ADVERTISEMENT

(2)한·미 재단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4면

1952년 한국동란이 치열해져 가고 있을 때 한국을 방문한「아이젠하워」장군(그 당시 미 대통령당선자)의 머리에는 전쟁으로 집을 잃고 불구자가 되고 고아가된 수많은 한국인을 위해서 순수한 민간「베이스」로 원조사업을 할 수 없을까하는 생각이 문득 떠올랐다. 「아이젠하워」장군은 그의 사회문제고문「호워드·A·러스크」박사를 한국에 급파, 전쟁으로 폐허가 되다시피 한 한국을 위해서 무엇을 해야할지 알아보도록 지시했다.
1차 방한을 마친「러스크」박사는 한·미 재단(AKF)설립을 추진, 그 자신이 재단이사회의장직을 맡아보게 됐다. 재단이사로서는 전「유엔」군사령관「클라크」장군, 전 주한미대사부인「다우링」여사, 전 주미한국대사 양유찬 박사 등이 취임했다. 이사회는 전 미8군사령관「밴·플리트」장군을 초대회장으로 선출, 「뉴요크」와 서울에 사무실을 두고 원조사업에 착수했다.
설립이래 13년간『한국인들의 자조를 돕자』는「모토」를 내세우고 한·미 재단은 현금 6백만「달러」와 9백만「달러」어치의 물자를 한국을 위해서 사용했다. 재원은 순전히 미국시민의 기부금과 기증품, 1954년과 55년에는「우정열차」라고 명명된 약 천여 대의 자동차가 미국본토 48주를 순방해서 한국전쟁피난민을 위한 구호물품을 수집하는데 큰 성과를 거두었다.
재단설립초기에는 전쟁난민구호와 복구사업에 주력했으나 근년에 와서는 일시적인 구호보다는「한국민들의 생활수준향상」이라는 장기적인 목표달성에 힘을 기울이고 있다. 이러한 목표달성을 위해 우선 시작한 사업이 4H「클럽」의 부활이다. 1946년 미군정 당시에 4H운동을 한국에서 처음 시작한「찰즈·A·앤더슨」예비역대령을 초청해서 이 운동을 재개시켜 현재는 전국 각지에 8천여 4H「클럽」(회원 25만명)이 조직되어있다.
한·미 재단은 또 한국에서 계단식 개간사업의 선구자이다. 이 재단의「아이디어」와「이니시어티브」로 재작년 초부터 시작되어 현재는 전국 수십 군데에「계단식개간사업장」을 볼 수 있게 되었다. 한·미 재단은 지역사회개발이나 농업분야 뿐만 아니라 교육·사회복지·문화면에도 손을 뻗치고 있다. 교육사업으로는 중·고등학교의 빈곤한 학생들에게 장학금 급여와 미국에 유학하고자하는 젊은이들에게 자문과 지도를 해주고 유학을 끝마치고 귀국한 이들에게는 직업까지 알선해주고 있다.
사회복지사업으로는 고아들에게 집을 마련해주고 현대식농장과 기술을 습득시킴으로써 그들이 자립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기 위한「오산소년촌」과 서울의「새마을고아원」을 돕고 있다. 문화사업의 대표적인 예는 1962년부터 미국의 주요도시를 두루 돌아다니며 열고있는「한국소개사진전」을 들 수 있다.
이와 같이 한·미 재단은 한국민과 미국민간의「영구적인 우정」을 돈독히 할뿐만 아니라 무지와 불행을 이용하고있는 공산주의의 침투를 저지시키고자 노력하고 있다.<민>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