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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벽돌에 기와 얹은 성당, 구한말 신부 숨겨준 송광사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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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익산에 있는 나바위 성지 성당.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한옥 성당이다.

아름다운 순례길은 길이 240㎞의 대형 트레일이다. 전라북도 전주시(32㎞)·완주군(80.4㎞)·김제시(40㎞)·익산시(87.6㎞)에 걸쳐 있다. 순례길은 모두 9개 코스로, 코스 1개의 길이가 평균 26㎞가 넘는다. 하루에 코스 하나씩 걸어도 꼬박 9일이 걸린다. 코스는 지역과 주제에 따라 나눠 볼 수 있다. 이를 테면 전주시에 걸쳐있는 1코스와 9코스는 성지순례와 전주시내 관광을 연계할 수 있고, 익산시에 있는 4코스는 드넓은 호남평야를 가로지르고 있어 길을 걸으며 명상에 잠길 수 있다. 2코스와 3코스는 완주군의 소박한 시골마을에 박혀있는 천주교와 기독교 성지를 찾아가는 길이고, 김제시에 있는 7코스에서는 6개 종교의 성지를 차례로 방문할 수 있다.

7코스 6개 종교 유적이 길 하나에

김제시 금산면에 있는 금산교회 옛 건물은 1905년에 지어진 ?ㄱ?자형 한옥이다.

김제시에 있는 7코스 금산사~수류 구간은 14.5㎞로 약 4시간이 걸린다. 9개 코스 중 가장 짧지만 가장 많은 종교성지를 집약적으로 만날 수 있다. 7코스는 금산사에서 시작한다. 금산사는 미륵 신앙이 발원한 사찰로 전북에서 가장 큰 절집이다. 터가 좋아서인지, 금산사 주변에서 증산교·대순진리교 등 신흥 종교가 줄 이어 탄생했다. 금산사에서 나온 길은 함평마을로 이어진다. 함평마을 표지석을 지나자 금산교회가 보였다. 지금은 교회가 양옥 건물로 옮겼지만, 옛날 금산교회는 1905년 지은 ‘ㄱ’자형 한옥 안에 있었다. 지금도 원형 그대로 잘 보존돼 있다. 지금도 가끔 한옥 교회에서 예배가 열리곤 한다.

 함평마을에서 빠져나와 20분쯤 걸었을까, 널찍한 저수지가 맞아줬다. 금평저수지를 끼고 산책길이 이어졌다. 저수지 테두리를 따라 조성된 산책길은 증산도 교주 강증산 부부의 무덤이 있는 증산법종교본부와 대순진리회의 성지인 동곡약방을 지난다.

 금평저수지를 지나자 원평교당·원평성당·원평교회가 사이좋게 모여 있는 원평마을에 다다랐다. 원평마을에 원불교가 들어온 것은 1922년이었다. 1930년 초가 두 채를 사들인 것이 원평교당의 시작이다. 원평교당의 김도천(53) 주임교무는 “일제강점기 때는 야학을 운영해 마을사람을 교육했고 신식 농법을 전수해 농업을 도왔다”고 소개했다. 원평교당에는 30명 정도가 들어갈 수 있는 순례자를 위한 숙소가 있다. 미리 연락하면 밥도 차려준다.

원불교 창시자인 소태산 대종사는 1924년에 익산중앙총부를 만들었다.

 원평교당 쪽으로 난 샛길을 따라가자 구미란 전적지가 나왔다. 1894년 동학농민군이 관군과 대적한 곳으로 여기서 동학군이 패배한 뒤 전국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구미란 전적지부터는 원평천을 따라 한적한 길이 이어졌다. 수평교·시목교 등 크고 작은 다리를 건너자 모악산이 한층 가까워졌다. 이윽고 개나리색으로 칠해진 수류성당이 보였다. 성당이 있는 김제시 금산면 화율리는 백 년 이상 된 천주교 교우촌이다. 한국전쟁으로 성당이 모두 불타 없어졌는데, 신자들이 직접 물자를 모았고 벽돌을 날라 복원했다고 한다.

4코스 명상의 길을 걷다

아름다운 순례길 7코스에 있는 김제시 주평교회.

4코스는 아름다운 순례길의 모티브인 스페인의 산티아고 길과 가장 많이 닮은 길이다. 코스 길이는 23.6㎞, 약 8시간을 걷는다. 구간 대부분이 논과 논 사이를 따라간다. 길을 걷다 보면 자신에게 온전히 집중할 수 있다.

 4코스는 익산시 나바위 성지에서 시작한다. 김대건 신부는 1845년 중국에서 사제품을 받아 한국 최초의 신부가 됐고 같은 해 10월 황산 포구 나바위 기슭에 상륙했다. 나바위 성지에는 김대건 신부를 기리기 위해 만들어진 성당이 있다. 빨간 벽돌 건물에 기와지붕을 얹은 이색적인 모습으로 평소에도 관광객이 자주 들르는 명소다. 내부에는 스테인드글라스 대신 한지 유리화(사진)가 붙어있다.

 나바위 성지부터는 호남평야를 가로지르는 길이 펼쳐진다. 개천을 따라 논 사이로 난 길을 20㎞ 정도 걸었다. 천변에서 먹이를 잡아먹는 재두루미·백로·고라니 따위가 유일한 길동무였다. 먼 풍경을 바라보다 발끝으로 시선이 향했다. 한바탕 바람이 일었다. 서로에게 몸을 부딪친 갈대가 스산하게 울어댔다.

  미륵산 등산로를 따라 한 시간 걸어 미륵사지에 닿았다. 미륵사는 백제 무왕이 창건한 절로 세 개의 탑과 세 개의 금당이 있는 동양 최대 사찰이었지만, 지금은 석탑 하나와 주춧돌만 남아있다. 미륵사지 발굴에만 15년이 걸렸고 출토된 유물은 2만여 점이라고 한다. 왠지 마음이 차분해졌다.

 익산 시내에 있는 원불교 중앙총부는 순례길에서 떨어져 있었다. 그러나 순례길 지도에는 주변 명소로 소개돼 있다. 원불교의 본산인 익산 중앙총부는 원불교의 교화·행정·교육·문화의 중심지다. 원불교 창시자인 소태산 대종사가 1924년 터를 잡고 포교를 시작했다. 중앙총부 안에 대종사가 총부를 만들었을 당시 모습이 그대로 보존돼 있다.

9코스 전주·완주 종교 성지 순례

5 전주시 한옥마을 끄트머리에 자리하고 있는 전주 향교. 6 금산교회 내부 모습. 7 모악산 자락에 있는 김제 수류성당. 8 완주군 송광사에는 보물 제1244호로 지정된 십자모양의 종루가 있다.

전주 시내를 지나는 코스는 30㎞ 정도다. 전체 구간 중 극히 일부지만 종교 성지와 볼거리가 고루 섞여 있어 관광객에게도 추천할 만하다.

 붉은 갈대가 무성한 전주천변을 따라 걷다 전주로 진입했다. 시내에 들어와 처음 만난 종교유적지는 숲정이 성지였다. 여기서 수많은 천주교인이 목숨을 잃었다. 호남의 첫 사도인 유항검의 부인을 비롯해 일가족 4명이 죽임을 당한 것을 시작으로 병인박해(1886년)·기해박해(1893년) 때도 수많은 천주교 신자가 여기서 처형당했다.

 숲정이 성지 다음으로 발길이 닿은 곳은 호남 최초의 교회인 서문교회였다. 태어날 때부터 서문교회 신자였다는 박보석(71)씨는 “1893년 남장로교회 선교회가 파견한 정해원씨가 초가 한 채를 사서 선교를 시작한 게 서문교회의 뿌리”라고 설명했다. 지금은 규모가 큰 대형교회 건물로 바뀌었지만, 1908년에 만들어진 종각만큼은 예전 모습 그대로였다.

 서문교회부터는 본격적으로 전주 시내를 걷는다. 전주 읍성의 남문이었던 풍남문, 전동성당과 경기전이 차례로 눈에 닿았다. 경기전은 태조 이성계의 어진을 모신 곳으로 조선 왕조의 성지와도 같다. 전동성당은 정조 15년(1791년)에 순교한 윤지충·유항검을 기리기 위해 1914년 세운 성당이다. 수많은 영화와 드라마에 등장한 관광명소이기도 하다. 유철종(73) 해설사는 “경기전과 전동성당이 마주보고 있는 것이 오묘하다”며 “일제강점기 때 일제가 조선왕조의 맥을 끊겠다며 전주 읍성을 헐면서 경기전과 전동성당이 지금처럼 마주보게 됐다”고 설명했다.

  북적거리던 전주 시내를 빠져나온 뒤 처음 다다른 곳이 20분 걸려 올라가야 하는 치명자 성지였다. 여기에는 1801년 숲정이에서 처형당한 유항검 등 순교자 7명이 묻혀 있었다. 살아남은 신자들이 한밤에 몰래 시신을 거둬 이 산꼭대기에 묻었다.

 1코스 종착점은 완주군에 있는 송광사다. 5년 전만 해도 송광사 대웅전 앞에는 커다란 마로니에 나무가 서있었단다. 나무가 너무 커 버려 대웅전을 가리는 탓에 베었다는데 이 나무에 얽힌 사연이 흥미롭다. 19세기 박해를 피해 송광사에 숨어든 신부를 스님들이 정성껏 보살폈는데, 훗날 외국인 선교사가 감사의 표시로 이 나무를 선물했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 산사에 외래종 나무가 서 있을 이유가 없다는 설명이다.

글=홍지연 기자
사진=신동연 선임기자

●여행정보=아름다운 순례길(sunryegil.org)은 전라북도 산하 조직인 세계순례대회조직위원회와 전라북도 관광산업과 종무계가 관리한다. 순례길을 내는 데 약 20억원이 들었는데, 이 중에서 90%를 전라북도가 지원했다. 순례길 운영은 조직위원회가 맡고 있고, 4개 시·군은 이정표를 세우는 등 편의시설을 관리한다. 전주시 덕진구에 있는 세계순례대회조직위원회 사무실에 들르면 1만원으로 순례자 여권을 살 수 있다. 여권에는 순례길 전체 지도와 각 코스 주요 기점이 보기 좋게 정리돼 있다. 전라북도가 제작한 길 안내 애플리케이션 ‘순례길’도 활용할 수 있다. 순례길에 있는 40여 개의 마을회관, 템플스테이, 피정의 집 등에서 숙박할 수 있는데, 조직위원회를 통해 예약을 해야 한다. 1박 2만원. 063-278-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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