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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인은 프로세스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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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김기현

서울 한남동 한 건물의 지하실. 지난달 28일 찾은 이곳은 춥고 휑했다. 콘크리트벽을 그대로 드러낸 빈 공간에 밴드소우, 샌더 따위 목공기기와 조립식 탁자만이 덩그러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다른 가구와 작품은 배편으로 이달 중순에나 온다고 했다. 이 지하실은 ‘디자인 메소즈(Design Methods)’ 김기현(34) 공동대표의 꿈과 도전이 시작될 곳이다.

 제품 디자이너 김기현. 세상에서 가장 가벼운 나무 의자인 ‘1.3체어’로 세계에 이름을 알린 젊은이다. 중량 1.28㎏으로 보통 나무 의자(4∼5㎏)의 3분의 1 정도밖에 안 되는 초경량이다. BBC 방송에서 본 영국 폭격기 ‘DH. 98 Mosquito’에서 영감을 얻었다.

 가구공장서 만든 이 비행기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가장 빠른 폭격기였다. 모든 에어프레임에 발사(Balsa)나무와 합판을 썼다. 통상 나무를 키워 목재로 쓰려면 20∼30년을 기다려야 한다. 발사나무는 성장 속도가 빨라 7∼8년이면 된다. 또한 가볍고 가공이 쉽다. 결정적 약점은 무르다는 것. 김씨는 수 천 번의 실험을 통한 압축성형으로 이를 극복했다.

디자이너 김기현(34)이 만든 세상에서 가장 가벼운 나무 의자 ‘1.3체어’. 전쟁의 상징인 무기를 디자인과 결합해 각광받았다. 독일 자이트라움(Zeitraum)사에서 제작하고 있다. [사진 니콜라 트리(Nicola Tree)]

 이 의자는 그에게 세계 최대의 디자인 박람회 중 하나인 ‘100% 디자인 런던’에서 최우수 소재상인 블루 프린트 어워즈(2011)를 시작으로, IDEA 은상(2012), 런던 디자인 뮤지움의 ‘2012 올해의 디자인’ 가구 부문 대상을 안겨줬다. 지난해 4월 열린 런던 디자인 뮤지움의 시상식에서 패션 부문 수상자는 패션을 예술로 승화시켰다는 이세이 미야케 였다. 김씨의 요즘 위상을 말해주는 증거다.

 발사나무 의자에 대한 당시 심사평은 이랬다. “젊은 디자이너가 나무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바꿔 놓았다.” 즉 모양보다 소재의 재발견, 과정과 본질의 추구가 높은 평가를 받았다. 그는 “내게 디자인은 프로세스(process)다. 가정만으로는 안 된다. 과정과 수단과 방법과 접근과 계획을 통한 결과 도출이 혁신을 만든다. 모든 것을 직접 경험해 보면 갈 수 있는 길이 많아진다”고 했다.

 시작은 아버지의 현장이었다. 부산서 건설 시공업을 하던 아버지는 어릴 적 그의 우상이었다. 파인 땅에서 점점 건물이 올라오고, 거기 사람들이 드나들며 생활하는 것은 일종의 경이였다. 아버지의 일터가 곧 그의 놀이터였다. 부산예고를 나와 경원대 산업디자인과에 진학했다. 여전히 서울대·홍익대 미대가 양분하는 한국의 학연 판도에선 불리한 조건인지도 모른다.

 그는 가전회사 루펜을 거쳐 영국 왕립예술학교(RCA)로 유학을 떠났다. 선망하던 디자이너들로부터 직접 배웠고, 소규모 스튜디오를 열며 꿈을 쌓는 또래 디자이너들을 보며 용기도 얻었다. 해외 유수의 디자인상을 받으며 “한국의 척박한 환경서 묵묵히 일하고 있는 디자이너들에게 영광을 돌리고 싶다”고 수상 소감을 밝힌 배경이다.

 “우리나라의 디자인 저력은 전자산업에서만 발휘되고 가구 같은 생활 분야에는 아직 미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한 나라의 디자인 수준이 향상되려면 전반적인 관심이 높아질 필요가 있어요.” 그는 올해부터 이 ‘척박한’ 서울에 정착할 계획이다.

 -작품활동에 외국이 낫지 않나.

 “일본 디자인, 북유럽 디자인, 영국 디자인이라는 말은 많이 쓰이는 반면 한국 디자인을 호명하는 이들은 적다. 한국 디자인의 독창성을 확립하고 싶다는 꿈이 있다.”

김씨가 디자인한 대안 알람시계. 알람 기능이 있는 콘센트로 선풍기·커피머신·라디오 등 가전제품에 연결하면 맞춰둔 시간에 기기가 작동한다.

 소위 명문 미대 출신의 디자이너들이 기업체에서 여러 해 일한 뒤 그 경력과 네트워크를 이용해 창업해 자리를 잡는 게 이 업계의 통상적 경로다. 하지만 그는 RCA 후배 문석진(32)씨와 함께 디자인 메소즈를 창업해 홀로서기를 선택했다.

 -과감한 건가, 무모한 건가.

 “영국서 큰 회사들의 취업 제안도 받았다. 하지만 기업의 안정적 디자이너보다 새로운 가치를 찾아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디자이너가 되고 싶다. 3∼5년간 다른 곳에서 일하다 보면 이런 정신을 잃을까 봐 두려웠다. 무모한 실험을 기다려줄 고객을 만나는 게 관건일 거다.”

 그는 올 3월 개업을 앞두고 요즘 빈 사무실에서 일하고 있다. 청년취업이 어렵고, 중소기업도 흔들리는 시대, 그가 희망의 한 징표가 됐으면 좋겠다.

 -지난해 성과가 컸다.

 “런던 디자인 뮤지움의 ‘2012 올해의 디자인상’ 수상은 내 인생 최고의 사건이었다. 첫 아이도 가졌다.”

 -올해 소망이라면.

 “사업이 잘 자리잡고, 건강한 아이가 태어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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