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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세계 권투계 누빈 서정권씨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약관 19세로 동양경량급의 선수권을 모조리 획득, 이어 미국에서 「리를·타이거」(작은 호랑이) 라는 「링·네임」으로 세계무대를 화려하게 누볐던 우리나라 권투의 선구자 서정권(56)씨.
그는 화려했던 추억만을 되씹으며 지금 서울인왕산 산비탈(종로구 사직동119)에서 가난한 셋방살이를 하고있다.
「플라이」급 선수로 물레바퀴 돌듯 치는 「펀치」가 살인적이라 해서 동양서는 백년에 하나 날까말까하다는 격찬을 듣던 그가 한때의 영화를 한낱 추억으로 돌리고 단간 셋방에서 당장 끼니를 걱정하고 있으니 초로인생은 여기서도 찾을 수 있다.
순천에서 4천석을 하던 갑부의 3남으로 태어난 그는 17세에 단신도일, 2년 후에는 벌써 일본 「플라이」급 선수권을 차지하고 차츰 「밴텀」·「페더」·「라이트」급에 도전, 전동양의 경량급 왕자가 됐다.
이와 같이해서 동양에서는 상대를 구할 수 없게 되자 그는 「하와이」를 거쳐 미국으로 건너가 「필리핀」의 「리툴·판초」를 단숨에 물리치면서 이름을 날리기 시작, 3년 동안 무려 53차의 「게임」을 했다.
그리고 그는 마침내 동양인으로서는 감히 엄두도 못 냈던 세계 「밴텀」급 3위에까지 올랐고 3만 이상의 관중을 끌어들이게 되었다.
1935년의 봄, 그는 개선장군 못지 않게 고국에 돌아왔다. 현금만도 30만「달러」였고 양복이 20여벌 구두가 60켤레 「넥타이」가 2백80개를 넘어 어느 갑부에 못지 않았다.
그뿐이 아니었다. 그가 돌아온 서울역에는 수천의 「팬」들로 혼잡을 이루어 장안의 화제가 됐다.
그러나 이 같은 영화도 한때.
그후 차차 서정권이라는 이름 석자는 사람들의 뇌리에서 사라져갔다.
그는 해방 후 온힘을 기울여 경리에서 후진을 양성했다. 지금은 다 잊혀진 주인공들이지만, 최정재(주니어·플라이) 노진호(라이트)와 박노식(영화배우)등은 그가 길러낸 제자들이다.
현재 장녀 남석(23·모 은행근무)양의 가벼운 봉투로 일곱 식구를 거느리고 있는 그는 찢어지는 듯한 가난 속에서도 우리나라 권투의 재건을 버릇처럼 뇌고있다,
들리는 바로는 곧 재일 친지들의 주선으로 도일하여 완비된 도장을 서울에 마련할 것이라 한다. 「사각의 왕자] -. 그의 소원이 이룩될 때는 언제일지…. <노영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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