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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공산당 18기 정치국위원 열전 ⑥] ‘인사집행관’ 자오러지(趙樂際)

온라인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자오러지 중국공산당 중앙조직부장, 중앙정치국 위원

산시성 안사이(安塞)현의 한 소학교에서 현지 시찰 중 학생의 말을 경청하고 있는 자오러지.

자오러지는 2007년 산시성 서기로 부임한 첫 해 90개 현을 모두 시찰할 정도로 현장 정치에 열성적이었다. 사진은 한 빈곤 농가를 방문해 노인을 위로하는 장면.

지난 세밑 중국 공안부 영도간부회의가 소집됐다. 멍젠주(孟建柱) 전 공안부장이 정법위 서기에 임명되면서 공석이 된 공안부장 자리를 궈성쿤(郭聲琨)이 이어받는 자리였다. 멍젠주 바로 옆에 앉은 자오러지(趙樂際) 중앙조직부장이 제일 먼저 마이크를 잡았다. “당 중앙은 공안부 주요 책임 간부의 직무 조정 결정을 내렸음을 선포한다”며 말문을 열었다. 그는 멍젠주 전 부장의 업적을 평가한 뒤 궈성쿤 신임부장의 이력과 과제·기대를 간부들에게 전했다.

지난 12월 18일에는 광둥(廣東)성에서 공안부와 같은 영도간부회의가 소집됐다. 왕양(汪洋)에서 후춘화(胡春華)로 광둥 당서기가 교체되는 자리였다. 이때 역시 당중앙의 결정을 성 간부들에게 직접 전달한 사람도 자오러지 조직부장이었다.
8260만 중국 공산당원의 인사파일인 당안(?案)은 당 각급 조직부가 관리하고 자오러지가 수장을 맡은 중앙조직부는 전국 3000~4000명의 중요한 지도자 노멘클라투라(인사명부)를 관리한다. 보통 성급 서기의 교체는 중앙조직부 차석이 선포하고, 직할시나 최고위 권력기구 수장 교체는 조직부장이 직접 처리하는 것이 관례다.

◇‘서부토박이’에서 ‘시파(習派)’의 후견인으로
자오러지는 험준한 자연환경에서 단련된 지도자다. 칭하이(?海)성과 산시(陝西)성에서만 근무했다. 경제적으로 발전한 동부나 남부 연해지역 경험이 전혀 없다. 그러나 경제 성장 성적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뛰어나다. 그가 칭하이성을 다스리던 기간 성 전체 GDP는 두 배 증가했다. 신중국 건립 후 가장 빠르게 발전한 시기였다. 그가 곧 이어 영전한 산시성 역시 굴기(?起)에 성공했다.
1957년 3월 서북 오지 칭하이(靑海)성 시닝(西寧)에서 태어난 자오러지는 17세 때 문혁에 휩쓸려 칭하이 구이더(貴德)현 허둥(河東)향 궁바대대(貢巴大隊)의 지식청년으로 활동했다. 이듬해 칭하이성 상업청의 일개 통신원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1977년 문혁 후 첫 대학생으로 베이징대 철학과에 입학했다. 학부 4년 베이징 생활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다시 칭하이로 돌아온 그는 상업청 정치처 간사, 교사, 상업청 청장까지 16년 동안 상업 분야에서 줄곧 근무했다.

1993년 자오러지는 칭하이성 성장 조리 겸 성 재정청 청장으로 승진했다. 97년에는 칭하이성 성도인 시닝(西寧)시 서기로 승진했다. 만 40세 불혹의 나이에 불과했다. 2년 후 그는 칭하이성 대리성장으로 재차 승진 장관급 업무를 처음 맡았다. 지금으로부터 10년 전인 2003년 후진타오(胡錦濤) 정부 출범과 함께 그는 칭하이성 서기에 임명됐다. 만46세. 당시 최연소 성서기 기록이었다. 당시 중국은 동서간 빈부격차 문제 해결을 위해 대대적인 서부대개발 전략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자오러지는 여기서 기회를 발견했다. 칭짱(靑藏)고원의 차이다무(柴達木)분지에 순환경제구 건설을 시작했다. 2000년 263억 위안이던 칭하이성의 GDP를 2006년 641억 위안으로 끌어올리는데 성공했다.
그는 개발지상주의자가 아니었다. 경제성장을 위해 환경과 민생을 포기하지 않았다. 경제발전에 도움이 되더라도 환경오염 기업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칭하이성은 중국의 젖줄인 창장(長江), 황허(黃河), 란찬장(瀾滄江, 동남아 메콩강)의 발원지다. 자오러지는 이 강물의 발원지에 자연보호구를 건립했다. 중앙정부와 담판 끝에 이 보호구에 중앙 예산 수십 억 위안의 투자를 유치하는데 성공했다.
“나는 보통 지식청년에서 당의 고급 간부로 성장한 사람입니다. 칭하이의 낙인이 깊이 새겨진 사람입니다. 칭하이의 정서가 뼈 속까지 사무친 사람입니다.” 그가 2007년 칭하이를 떠나 산시성으로 부임하면서 남긴 이임사의 한 구절이다. 그의 ‘서북토박이’ 면모가 넘치는 대목이다.

산시성은 중국 문화의 발원지다. 과학 교육 대성(大省), 문화 대성, 여행·자원·광업 대성이란 수식어가 붙는 성이다. 단 이러한 호칭에 무색하게 경제발전 수치는 저조하기 이를 데 없었다. 2007년 경제총량 전국 20위에 불과했다. 막 부임한 자오러지는 새로운 전략을 제시했다. “‘대(大)’에서 ‘강(?)’으로”. 충분한 발전 잠재력을 폭발시킬 전략을 제시한 것이다.

서부개발의 교두보 산시성에 들어온 자오러지를 외부는 일단 관망했다. 그는 산시성을 서부의 강성(?省)으로 변모시키겠다는 이념 아래 내륙형 경제 개발 개방전략을 추진했다. 우선 관리들의 업무 관행부터 뜯어 고쳤다. 모든 주민의 창업을 장려하고 주민들과 잘살아 보세를 외쳤다. 기회의 균등을 보장했다. 결과는 놀라웠다. 개방 실무형 풍조가 넘치기 시작한 산시성은 발전의 선순환 사이클에 접어들었다.
자오러지는 ‘서부=낙후’라는 편견을 깨뜨렸다. 동부연안에만 발전 모델이 있다는 통념도 깨뜨렸다. 자오러지의 산시성 5년 동안 국제 금융위기, 원촨(汶川)지진 등의 영향도 극복하고 1조위안 클럽에 합류했다. 2011년 산시성 GDP는 1조2000억 위안을 기록 경제 발전 속도 전국 1위를 차지했다.

올 11월20일 자오러지는 산시성을 떠났다. “3700만 고향 어른들(자오러지 조상인 산시성 시안 출신이다)을 위해 이 땅에서 복무할 수 있었던 것은 행운이었습니다. 산시성의 발전과 여러분들의 복지 증진을 위해 노력한 힘은 저에게 얻기 어려운 소중한 보물입니다. 당의 간부 한 사람으로 산시성 이 뜨거운 땅에서 기른 옌안(延安) 정신을 저는 일생 지키고 널리 퍼뜨리겠습니다”라는 이임사를 남긴 채.

자오러지는 후진타오와 시진핑(習近平) 모두와 연결되는 인물이다. 후진타오가 1974년부터 82년까지 8년간 근무했던 간쑤(甘肅)성이 칭하이와 산시의 중간이다. 산시성은 시진핑의 아버지 시중쉰(習仲勳)이 혁명활동을 벌인 곳이자, 시진핑이 태어나고 문혁 기간 하방됐던 지역이다. 중국공산당의 가장 중요한 요직인 조직부장에 후진타오, 시진핑과 동시에 친분을 가진 인물을 절묘하게 선택한 것이다. 앞으로 5년 자오러지의 임무는 시진핑의 사람들을 요직에 앉혀 ‘시파(習派)’의 후견인이 되는 것이다.

신중국 성립 이후 중앙조직부 수장 21명 중 8명이 상무위원을 역임했다. 그만큼 강력한 조직이란 증거다. 하지만 지난 18차 당대회에서 전임자 리위안차오(李源潮)가 상무위원 진입에 실패했다. 지난 99년 조직부장에 올랐던 쩡칭훙(曾慶紅)이래 13년 만의 일이다. 자오러지의 어깨에 중앙조직부의 ‘체면’이 달려있다는 말이 나오는 이유다.
신경진 중국연구소 기자 xiaoka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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