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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희 대기자의 투데이] 盧당선자는 무슨주의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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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김영희
김영희 기자 중앙일보 고문

과거에 공산주의자였던 귀하가 지금은 무슨 주의자입니까?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사회적 자유주의자(Social liberal)요."

사회적 자유주의는 다른 자유주의자와 어디가 다른가요?

"사회적 자유주의는 경쟁에서 진 패자(敗者)들을 배려해요."

이것은 3년 전 바르샤바에서 알렉산데르 크바시니에프스키 폴란드 대통령과 중앙일보 기자가 주고받은 말이다. 소련.동유럽의 사회주의 시대에 공산주의자로 출세가도를 달리다가 사회주의 체제가 붕괴된 뒤에는 자유민주주의자로 변신하는 데 성공한 사람은 그렇게 많지가 않다. 크바시니에프스키는 그런 예외적인 인물이다.

크바시니에프스키는 친절하게 보충설명을 했다. "빈곤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만 관심이 있는 정부는 경제를 효율적으로 운용하지 못하고, 자유주의의 원칙만 강조하는 정부는 파티에서 다른 사람들은 허름한 옷을 입고 있는데 저 혼자만 화려한 옷을 입고 있는 사람과 같습니다."

정부가, 아니 국가가 사회.경제정책으로 좋은 옷을 입은 사람들한테서 세금을 더 거둬 허름한 옷을 입은 사람들의 생계비와 의료비.교육비 따위를 보태는 것이 자유주의 앞에 "사회적"이라는 수식어를 달고 있는 노선이다. 그러나 기조는 자본주의 시장경제다.

*** 사회적 자유주의 목표는

노무현(盧武鉉)대통령당선자를 사회적 자유주의자라고 부른 사람은 아직 없다. 그러나 크바시니에프스키의 말을 듣고 보니 지난해 12월의 대통령선거는 신자유주의자 이회창(李會昌)과 사회적 자유주의자 노무현의 대결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말할 것도 없이 신자유주의는 시장에서의 자유경쟁이 최고라는 전제 아래 정부의 시장 개입은 최소한으로 줄이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입장이다. 신자유주의가 아주 극단으로 가면 "억울하면 출세하라" "억울하면 부자 되라"가 된다. 패배의 책임은 패자의 것이다. 사회복지에는 관심이 없다.

지금의 미국 대통령 조지 W 부시가 신자유주의의 대표선수다. 미국의 로널드 레이건과 영국의 마거릿 대처의 신자유주의는 1980년대를 주름잡았다. 이회창 후보가 당선됐다면 아마도 부시-고이즈미를 잇는 신자유주의 동맹에 가입했을 것이다.

신자유주의와 사회적 자유주의의 역사적인 회전(會戰)에서 이긴 장수는 노무현이다. 그래서 성장 위주의 경제정책을 반성하고 소득의 공정한 분배와 경제정의의 실현을 강조하는 젊은 개혁파 학자들이 줄줄이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에 들어갔다. 그중 한 사람은 아예 "신자유주의 극복을 위한 대안정책연대회의" 정책위원이라는 직함을 갖고 있다.

그들의 사부(師父)인 변형윤 서울사회경제연구소 이사장의 말을 들으면 노무현 정부의 경제정책이 어느 방향으로 흐를 것이며 성장과 분배의 어느쪽에 무게를 두게될 것인지를 쉽게 짐작할 수 있다. "9%, 10% 성장해야 성장인가. 5%, 6% 성장하면 안되나… 분배를 10년 하다가 후유증이 생기면 다시 성장으로 돌아가면 돼."(어제 날짜 중앙일보 인터뷰)

가능하다면 신자유주의의 땅을 한뼘도 내어주고 싶지 않은 전경련 간부들에게는 등짝에 식은 땀이 흐를 소리다. 인수위원회가 공기업 민영화에 제동을 걸고 나오는 것도 불길한 징조로 보일 것이다.

그래서 전경련 김석중 상무가 그런 말을 한 것 같다. 그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고 해명했지만 분배론자 변형윤 교수의 제자들이 포진한 정권인수위원회가 지향하는 것은 사회주의라고 말해버렸다.

*** 빈부 共生의 원인 비전을

인수위원회가 지향하고 노무현 정부가 채택할 경제사회정책은 사회주의적인 것이 아니라 노조가 기업경영에 큰 폭으로 참여하고 사회복지정책을 최대한으로 펴는 독일의 사회적 시장경제에 가까운 것이 아닌가 싶다.

그러나 기업경영의 노사 공동결정을 도입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독일 수준의 사회적 시장경제에는 훨씬 못미치는 사회적 자유주의 노선에 머물지 않을까.

인수위가 金상무의 발언을 트집잡아 전경련에 겁을 주는 것은 유치하다. 지나치면 역(逆)매카시즘이 된다. 새 정부의 경제정책이 불안한 사람이 金상무뿐일까. 인수위는 점령군 같은 위압적인 자세를 버리고 허름한 옷 입은 사람들과 좋은 옷 입은 사람들이 공생하는 윈윈의 비전부터 보여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