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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73㎞ 대장정 골인, 다음 목표? 벌써 몸이 근질근질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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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3호 24면

항저우의 자랑인 시후(西湖)에서 남방 여성의 특징을 골고루 갖춘 예쁜 아가씨가 바람 쐬는 모습을 렌즈에 담았다. 시후는 항저우 서쪽에 있어서 그런 이름이 붙었겠지만, 이 부근에서 태어난 중국 4대 미녀로 꼽히는 서시(西施)처럼 아름답다고 해 부르는 이름이기도 하다.

양쯔(揚子)강을 건넌 뒤 항저우(杭州)로 가는 길에는 타이후(太湖)가 가로막고 있다. 중국에서 장시(江西)성에 있는 포양후(<9131>陽湖)에 이어 두 번째로 큰 담수호다. 원래는 세 번째였으나 수역이 줄어든 후난(湖南)성 둥팅후(洞庭湖)를 최근 제쳤다. 타이후는 면적이 2338㎢로 그 안에 제주도(1848㎢)를 넣어도 둘레에 있는 창저우(常州)나 우시(無錫)·쑤저우(蘇州)·이싱(宜興)·후저우(湖州)에 물이 튀지 않을 것이다. 물론 제주도를 세로로 돌려서 살살 집어넣어야겠지만.
타이후를 어떻게 우회할까. 동쪽으로 가면 쑤저우·자싱(嘉興)을 거쳐 징항(京杭)대운하를 따라간다. 하지만 시안으로 갈 때 간 길과 겹친다. 서쪽으로 가면 운하에서는 벗어나지만 더 가깝고 안 가본 길이다. 이틀 안에 항저우에 닿으려면 서쪽으로 가자. 먼 옛날이었으면 이런 고민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타이후는 원래 황해의 굽은 해안이었다. 실제로 104번 국도를 타고 바라본 타이후는 망망대해 같다. 이 어마어마한 만을 호수로 만들어야겠다고 결정하고 기공식을 연 적은 없었지만 양쯔강과 첸탕(錢糖)강은 부지런히 흙과 모래를 실어 날랐고 만이 가로막히자 빗물을 집어넣어 소금기를 뺐다. 그러자 은어와 강준치, 흰새우가 사는 담수호가 완성됐다. 물론 베이징원인(原人)조차 태어나기 전의 일이다. 5000만 년 전 운석이 떨어져 생긴 구멍에 4000만 년 동안 물이 스며들어 1000만 년 전부터 호수가 됐다는 설도 최근에 제기되고 있다. 자연의 시간으로 보면 인생은 하루살이다.

[홍은택의 중국 만리장정] <36> 삼각코스의 마지막 꼭짓점, 항저우<끝>

나쁜 길도 항상 나쁘지만은 않더라
서행 길에는 생각보다 고개가 많았다. 시안이나 베이징에서 항저우로 간다면 타이후의 서쪽이 더 가까운데도 그동안 왜 동쪽으로 다녔는지 알 것 같다. 갈림길이 나올 때마다 가보지 않은 쪽이 더 나았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마음이 쓰인다. 하지만 여행을 길게 하다 보면 어떤 나쁜 길도 항상 나쁘지만은 않고 좋은 길도 항상 좋지만은 않다는 걸 깨닫는다. 좋은 길과 나쁜 길은 이어져 있다. 오늘 타이후를 서쪽으로 돌면서 경험한 것 역시 되풀이할 수 없고 되돌릴 수도 없는, 내 삶의 일부가 될 것이다.

날씨가 따뜻하고 습한 저장성에선 겨울에 난방을 할 필요가 없어 집을 넓고 높게 짓는다. 오래 봐도 질리지 않을 만큼 지붕 색깔도 단정하다.

마지막 날은 저장(浙江)성 창싱(長興)현에서 출발했다. 전날 호텔 직원은 옷차림을 보고 내가 사이클 대회에 참가하러 온 선수라고 착각해서 큰 방을 내줬다. 하지만 밤새 위층의 가라오케에서 음역을 벗어나 노래를 불러대는 통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보통은 어떤 훼방에도 불구하고 곯아떨어지는데 이날은 예민해져 있었다. 이제 여행은 끝이 난다. 그동안 준비해온 과정이 생각나면서 뭔가 묵직하게 복받쳐 오르기도 하고 가슴이 두근대기도 한다.

7년 전 미국 횡단여행을 마치고 미주리주 컬럼비아에 있는 집으로 돌아왔을 때의 일이다. 앞집에 사는 상하이 출신 아줌마한테 중국어를 배우면서 이 여행은 시작됐다. 아줌마에겐 두 살 딸 ‘안싱’이 있었는데 안싱은 엄마의 관심을 내가 잠시 가로채는 것도 못 견뎌 하며 떼를 썼다. ‘아기들이 다 그렇지 뭐’. 먹을 것을 떠먹여주면서 공짜 수업을 이어가려고 했지만 안싱은 밥그릇을 걷어차며 깽판(?)을 계속 쳤다. 결국 수업을 포기하고 아줌마에게 발음을 녹음해 달라고 해서 혼자 녹음기를 틀곤 했는데 안싱은 그 이후로도 마주칠 때마다 경계를 풀지 않았다. 그 아이가 왜 생각날까? 그때 내 중국어 수준은 안싱만도 못했다. 아마 그렇게 시작한 일이 오늘이면 마무리된다는 것을 곱씹고 싶어졌나 보다. 어쨌든 사표까지 내고 떠나온 여행 아닌가. 하지만 감격하기에는 이르다.

항저우에 도착했을 때 자전거에 매단 속도계에 주행 거리가 4873㎞로 표시됐다. 지도상 거리보다 1000㎞를 더 달린 셈이다.

오늘은 후저우에 들러 붓 박물관을 관람한 뒤 항저우로 남하하는 115㎞의 길이 예정돼 있다. 실제 얼마나 걸릴지 알 수 없다. 산둥(山東)성의 취푸(曲阜) 이후로는 매일 목표한 곳에 도달하지 못했다. 벌써 총 주행거리는 4700㎞를 넘어섰다. 항저우에 도착하면 4800㎞를 넘어선다. 원래 집에서 구글 지도로 계산했을 때 3748㎞로 나왔다. 여기에 길을 잃고 헤매는 허용오차 10%를 얹어서 삼각노선의 총 주행거리가 4200㎞라고 생각했다. 자전거로 1000㎞를 가라고 해도 쉽지 않을 텐데 헤맨 거리만 그만큼 되는 셈이다.

이걸 초과 달성이라고 할 수는 없다. 훙차오(虹橋) 공항에 도착하는 날부터 떠나는 날까지 매일 80㎞를 달려야 하는 거리라는 걸 예상했다면 이 노선을 포기했을 것이다. 미국을 횡단할 때도 6400㎞를 80일에 달렸으니까 하루 주행거리는 80㎞로 똑같다. 하지만 같은 80㎞를 가도 이제는 매일 한두 시간 더 페달을 밟아야 한다. 그만큼 느려졌다는 뜻이다. 길눈도 어두워져 헤매다 보면 체력이 고갈된 채 길에서 해가 진다. 근처 아무 마을에서나 잠을 청할 수밖에.

여행을 경주로 바꿔버리는 내 DNA
다음 날 미달한 거리를 만회하려고 채찍질을 가한다. 초반에는 능히 그럴 수 있을 것 같지만 결과는 마찬가지. 길에서 날이 저물고…. 그렇게 매일 작은 좌절의 연속이었는데 희한하게도 항저우가 눈앞에 있다.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흠, 그것은 오랜 가학적, 아니 피학적 습관이었다. 매일 공격적인 목표를 정해두고 끊임없이 스스로를 몰아붙인다. 그러다 보면 매일 조금씩 모자라도 결과적으로는 너끈히 최종 목표에 이르는 것이다. 유유자적한 자전거 여행자가 되고 싶지만 나의 DNA는 여행을 경주로 바꿔버린다. 비자만료 기간 60일 동안 중원에서 펼치는 1인 레이스. 목표가 주어지면 몰입해버리는 기질 때문에 오히려 길을 잃고 헤맨 1000㎞가 소중했다. 만약 헤매지 않았으면 좀 더 여유 있게 여행하는 대신 60일짜리 코스를 50일 만에 주파하려고 덤벼들었을 것이다.

매일 뜻밖의 곳에 머물게 되면서 항우(項羽)의 옛집, 묵자(墨子)기념관, 저우언라이(周恩來)와 주쯔칭(朱自淸)의 옛집을 들를 수 있었고 공자와 맹자가 100여 년의 시차는 있지만 산둥성의 인접한 동네에서 자라난 선후배라는 것도 알게 됐다. 무엇보다 라오바이싱(老百姓)과의 만남은 이번 여행의 정수였다. 물질적으로 풍요롭지는 않아도 각박하지 않고, 낙천적인 라오바이싱은 서방 작가의 책이나 신문기사에서는 볼 수 없었던 새로운 모습이었다. 그들과 함께 내 여행은 무탈했고 풍요로워졌다.

삼각노선의 마지막 꼭짓점은 구체적으로는 징항대운하의 남단인 궁천(拱宸)교로 잡았다. 마지막 날마저도 많이 헤매서 심지어 길조차 끊긴 농촌으로 들어갔다. 저장성의 농가들은 미국의 농가 저리 가라 할 만큼 커서 놀랐다. 3층짜리 단독주택들이 열 지어 있다. 집은 크지만 구조는 나무 위의 새집 같다. 대부분 1층은 곡식이나 농기구를 보관하는 창고로 쓰고 2층부터 거주한다. 그래서 남소북혈(南巢北穴)이라고 하나 보다. 북방은 춥기 때문에 동굴처럼 바람이 잘 들어오지 않도록 사방이 가로막힌 사합원(四合院)에 사람이 산다면, 남쪽은 덥고 습하기 때문에 바람이 잘 통하도록 집을 크고 높게 지은 뒤 되도록 높은 곳에 산다. 그래서 그런지 남방의 삶은 정치에 짓눌린 북방에 비해 밝고 가벼워 보이기도 한다.

항저우 안에 들어와서 더 헤맸다. 길은 휘고 갈라지고 모이고 꺾어지고 가지치고…. 그럴 때마다 자전거에서 내려 휴대전화의 지도를 보고 길을 더듬는다. 성가시고 조바심이 났다. 두 달을 자전거를 탔는데 아직도 엉덩이가 아프다. 해지기 전에 궁천교에 가야 기념사진이라도 찍을 수 있을 텐데…. 격자 무늬로 도로를 낸 사각형의 북방 도시와 달리 항저우는 시후(西湖)를 품고 있어 지형이 복잡한 탓도 있는지 도시의 형태가 무정형적이고 길은 꼬여 있다. 그래서 획일화되지 않은 남방의 문화가 꽃피울 수 있었는지도 모르지만 초행길의 내게는 오리무중의 산길을 걷는 것과 같다.

‘결승선까지 100m, 50, 10, 5, 4, 3, 2, 1’과 같은 카운트다운 대신 “궁천교가 어디 있느냐”를 몇 번이나 물었는지 모른다. 해질 무렵 찾아낸 궁천교는 보행자 전용 아치형 다리인데 금세 무너지지 않을까 걱정될 정도로 사람으로 가득 차 있다. 자전거를 밀고 올라가는 것조차 눈치가 보였다. 만리장정의 종지부를 찍는 이 순간을 음미하고 싶지만 인파에 둘러싸이고 만다. 어디서 출발했느냐고 묻는다. 상하이라고 하니까 불과 몇백㎞를 달려와서 이 법석을 떠느냐는 눈치다. 그래서 시안과 베이징을 거쳐왔다고 하니까 눈이 휘둥그레지면서 사진을 찍어대고 같이 사진 찍자고 조른다. 갑자기 환영 인파로 돌변한 군중의 관심은 고맙지만 혼자 있고 싶다. 서둘러 다리를 내려오는데 몇 사람은 계속 따라붙는다. ‘제발 좀 내버려둬’. 속으로 외치지만 여기는 중국이다.

만리장정 이후 다음 행선지는 어디냐고 묻는 사람들이 있다. 얘기해주지 않을 것이다. 입 밖에 내는 순간 그것이 나를 속박하게 될까 두렵다. 그것을 추구하기 위해 스스로 얼마나 다그칠지 생각만 해도 싫다. 하지만 알고 있다. 조금 지나면 새로운 목표가 스멀스멀 떠오르게 되리라는 걸. 벌써 몸이 근질근질하다.



홍은택 서울대 동양사학과를 졸업하고 동아일보에서 워싱턴 특파원을 지내는 등 14년간 기자생활을 했다. NHN 부사장을 역임했다. 저서로 『아메리카 자전거 여행』 『블루 아메리카를 찾아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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