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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러大戰' 역사적 뿌리는 뭔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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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비극적 결말을 가져온 '이상한 애정관계'의 과정을 다룬다. 이상한 애정관계란 냉전시대 말기 미국과, 가장 보수적이고 광적인 이슬람 추종자 사이에 맺어졌던 동맹과 파탄과정 전부를 말한다."

미국.아프카니스탄 사이의 테러와 보복전쟁으로 이어지는 갈등의 역사적인 뿌리를 분석한 책 『추악한 전쟁』(원제 Unholy Wars) 은 이렇게 암시적인 구절로 말문을 연다.

이 시기 지구촌 최대의 분쟁이자 머리 아픈 국제갈등을 솜씨있게 분석한 이 책을 따라읽다 보면, '낯익은 그림' 하나가 떠오른다.


◇ 분쟁의 뿌리 '70년대 미.소의 헤게모니 다툼'=이 책의 전체 주제이기도 한 낯익은 그림을 뭉뚱거려 말하면 이렇다.

'강대국의 전횡, 이 사이에서 비틀거리다 끝내 버림을 받는 약소국의 운명'. 즉 냉전 시절 카터가 이끄는 미국과 브레즈네프가 이끄는 옛 소련, 두 강대국이라는 연적(戀敵) 사이를 시계추 처럼 오갔던 약소국 아프가니스탄의 '끼어있는 지정학적 위치'가 오늘날 테러와 보복전쟁의 뿌리이고, 이것의 악성 파탄으로 이어져 오늘의 분쟁을 재생산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책의 장점은 미국.아프가니스탄 분쟁의 뿌리를 냉전 말기 미.소간의 최후의 국제정치 체스게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긴 호흡과 시야 확보에 있다.

즉 이 책은 기독교.이슬람 사이의 문명충돌이라는 거대담론의 접근과 전혀 다르다. 철저하게 강대국 편의주의와 자국중심주의의 논리에 의해 움직였던 두 강대국, 이 사이에서 끝내 매몰차게 내침을 당했던 아프가니스탄의 어제와 오늘을 그리는 데 열중하고 있다.

독자적인 취재망과 정보를 토대로 시간대별, 이해국가별로 치밀하게 재구성한 이 책의 가치는 이런 실증성이다.

이 책을 포함해 5권의 저술을 펴낸 ABC뉴스 소속의 중동문제 베테랑기자 존 K 쿨리가 펴낸 저술은 자신의 참전경험을 토대로 서술하기 때문에 설득력이 높다.

단 일부 편향적인 내용이 없지 않으나, 1999년 이 책의 초판이 나왔을 때 미국과 영국의 독서계는 높은 평가를 내렸다.

이를테면 전문지 '포린 어페어스' 전 편집장 찰스 메인즈는 "이 책을 읽게 될 경우 독자들은 이슬람원리주의자와 서방간의 충돌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게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 '어울리지 않는 연애'의 시말=저자가 '본래 어울리지 않는 연애 파트너 사이'라고 규정한 애정관계의 시작은 이렇다. 냉전시기 중동은 미.소간 이해가 맞선 전략지역.

미국은 특히 옛소련의 중앙아시아 제국과 맞닿은 국경지대의 요충지 아프가니스탄이 군주정 폐지 이후 친소 노선으로 기울어지자 불안감을 키워왔다. 아프가니스탄 내 반공세력에 대한 '은밀한 지원' 선택은 그 때문이었다.

"미국내 핵심관료들은 이런 지원활동이 소련을 자극한다는 것을 예상하고 있었다. 그것이 현실로 나타난 것이 1979년 크리스마스에 때맞춘 브레즈네프의 아프가니스탄 침공 결정이다. 당혹감 속에 중동 지배력을 잃을까 전전긍긍하던 미국의 카터는 CIA를 통한 '은밀한 활동' 을 시작했다. 반공주의적 이슬람세력을 이용해 대리전쟁을 치르는 것이었다. 이리하여 이슬람 과격분자들에 의해 '지하드'(성전) 와 탈레반운동이 시작됐다."

저자 쿨리의 이런 판단은 70년대 말 옛 소련과 미국의 핵심 참모들의 증언을 모아 재구성한 그림이다.

당시 브레즈네프는 주요 장성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전쟁을 결심했다는 점, 카터의 경우 베트남에서의 패배가 남긴 상처가 두려웠고, 그래서 보수적 참모 브레진스키의 조언을 받아 '깨끗한 CIA'라는 명분까지 포기하면서 '은밀한 지원'을 결심했다는 점이 소상하게 묘사된다.

◇ 곤두박질 치는 아프간의 운명=이 대리전쟁의 여파로 생긴 것이 바로 지하드(聖戰) 이고, 반(反) 외세 성향의 탈레반 운동이었다. 지하드와 탈레반은 초기에는 미국은 물론이고 서방과 파키스탄.이집트의 후원을 받았다.

이 지역의 전략적 이해를 함께 하는 중국 역시 '암묵적 동맹국'이었다. 오사마 빈 라덴도 이때 급성장한 세력이다.

역설적인 점은 미국의 네이비실 같은 특수부대가 지하드의 병사들을 훈련시켰다는 점이 이 책에서도 확인된다. 소련의 퇴각(89년) 은 곧바로 소비에트 체제의 해체로 이어지며, 냉전의 종식을 가져왔지만 문제는 아프가니스탄이다.

잘 훈련된 지하드 병사들은 조국을 비참한 지경에 몰아넣었다고 판단한 미국에 총부리를 돌렸다. 저자가 미국 아프카니스탄의 갈등을 '추악한 전쟁'이라고 규정하는 것은 대리전쟁을 부추긴 미국의 의도에 비판적인 시각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의 말을 들어보자.

"미국은 이 전쟁을 재정지원하기 위해 아프가니스탄의 일부 지역을 마약지대로 만들어버린다. 자신들의 선택이 가져올 엄청난 재앙을 감지했지만, '승리'라는 명분 때문에 약소국을 희생양으로 만든 것이다. 아프가니스탄을 마약생산기지로 전락시키고, 심지어 어린이까지도 마약중독자로 몰아넣은 것이다."

이번 전쟁에 대해서도 저자는 "미국의 선택이 가져온 예견된 재앙"이라는 식으로 냉소적으로 바라본다.

공산주의가 패망한 지금 미국이 상대해야 할 가상적이자, 악마의 화신으로 이슬람을 몰고 있는 것은 자칫 걷잡을 수 없는 재앙을 부를 수 있다는 우려 섞인 경계인 것이다.

책의 서술은 다소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촘촘하다. 이번 번역은 99년도 초판본의 개정본(2000년) 을 토대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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