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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발이 너무해', 금발은 멍청하다?

중앙일보

입력

'하버드 대학의 공부벌레들'이라는 TV 시리즈를 기억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비인간적으로 느껴질만큼 공부에 관한 경쟁과 학구열로 충만한 곳, 하버드 대학 법대생들 생활을 시리즈물로 만든 것이다. 어렴풋한 기억으로는, 시리즈물 중간에 공부하다가 학생이 자살을 하거나 교수로부터 인격적인 모독을 받는 등 무척이나 살벌했던 내용이었던 것 같다. 그런데 최근작 중에 의외의 영화가 있다. 영화엔 하버드 대학에 다니는 여학생이 나오는데 복장은 핑크빛으로 통일했으며, 옆구리엔 늘 강아지를 끼고 산다. 그리고 강의시간에 남들은 노트북을 들고 참석하는데 이 여학생은 하트 모양의 빨간수첩을 들고 어슬렁거린다. 도대체 이 여성의 정체는 뭘까?

'금발이 너무해'(원제는 리걸리 블론드)는 매력있는 영화다. 이 매력의 대부분은 한사람의 여배우로부터 뿜어져 나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리즈 위더스푼이 그 주인공. '사랑보다 아름다운 유혹'이나 '일렉션' 등 청춘물의 스타였던 리즈 위더스푼은 배우 라이언 필립의 (두사람은 '사랑보다 아름다운 유혹'에 함께 출연한 적도 있다) 아내로도 잘 알려져 있다. '금발이 너무해'에서 리즈 위더스푼은 코믹한 이미지의 배우로 변신을 시도한다. 하버드 대학 입학을 위해 비디오 에세이를 제작하면서 수영복 차림으로 등장하거나, 남성들에게 '프로포즈'하는 법을 다른 이들에게 가르치는 등 영화는 리즈 위더스푼의 발랄하면서 때로는 엽기적인 행동을 귀엽게 포장한다. 하지만 그녀를 대책없고 머리가 빈 여성으로 보면 오해다.

아름다운 금발의 리즈 위더스푼은 영화에서 엘 우즈라는 여성으로 분한다. 엘 우즈는 남자와 여자친구들에게도 인기좋은 학생인데 어느날 놀라운 일을 당한다. 하버드 법대에 다니는 남자친구가 자신은 '진지한' 여성을 원한다며 이별을 통보한 것. 엘은 일주일 동안 방안에만 틀어박혀 실연의 상처를 달랜다. 그러던 중 그녀는 기발한 아이디어를 떠올린다. 내가 하버드 법대에 들어가면 되잖아? 그곳에서 잃었던 사랑을 되찾으리라! 아는 것이라곤 패션과 헤어스타일, 그리고 쇼핑 밖에 모르는 이 여성은 하버드 법대에 입학하기에 이른다.

아마도 '금발이 너무해'를 보는 이들은 여러 영화들을 떠올릴지도 모르겠다. '클루리스'에서 '사랑보다 아름다운 유혹'에 이르기까지. 청춘, 특히 현대 여성의 소비지향적 태도와 성취욕, 그리고 연애에 관한 가치관을 중시하면서 '금발이 너무해'는 최근 할리우드 청춘영화의 맥을 놓치지 않는다. 너무 진지하거나 고리타분하지 말 것. 그럼에도 현실에 능동적이고 똘똘한 주인공을 내세울 것. '금발이 너무해'는 여기에 조금 더 흥미로운 시도를 덧붙인다. 요컨대 영화는 근본적으로 법정드라마의 틀을 벗어나지 않는다. 어느 공주 스타일의 여성이 스스로의 자질, 다시 말해서 패션과 헤어스타일, 그리고 여성들의 관심사에 정통함을 기반으로 하면서 변호사로서 길을 개척한다는 것이다. 조금 황당하고 어설픈 감도 있지만 영화는 법정에서 엘 우즈가 결국 승리하는 것을 클라이막스로 삼고 있으며 그녀가 성공적으로 학교를 졸업하는 것을 엔딩으로 선택한다. 청춘물과 법정 드라마의 틀을 고스란히 유지하고 있으되, 영화 속 여주인공이 몰고 다니는 스포츠카처럼 여러 장르들을 질주하면서 관객에게 즐거움을 주고 있는 거다.

아마도 영화를 보는 이들은 연출보다 영화 속 패션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일 것 같다. 영화에서 의상을 맡은 소피 카보넬은 엘라니스 모리셋 등의 뮤직비디오에 참여한바 있으며 리즈 위더스푼의 화려하기 이를데없는 의상을 선보이고 있다. 핑크빛 쟈켓에서 원피스, 그리고 토끼 인형 같은 파티복에 이르기까지. 특히 여성관객이라면 리즈 위더스푼의 의상을 보는 것만으로도 배부른 느낌이 올지도 모른다.

영화 대사도 톡톡 튀는 재미가 있는데 자신에게 관심보이는 남학생에게 "기각합니다!"라는 법률용어를 쓰고, 권위적이고 남성우월적인 학교 공동체에 여주인공이 작은 파문을 일으키는 과정도 위트있다. 역시나 "금발의 여성은 멍청하다"는 건 남자들만의 뿌리깊은 판타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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