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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전쟁할 수도 있다는 일본 착각 마라 과거의 너희도 우리도 더 이상은 아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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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3면

[일러스트=김회룡 기자]

난 오래된 것들을 좋아한다. 살림살이, 옷, 레코드판까지. 이가 빠진 도자기그릇에 담겨 있던 음식의 기억을, 옷에 남은 오래된 얼룩의 순간을, 7080 노래에 묻어 있는 바닷가의 추억들을 차마 버리지 못한다. 오래된 유명한 식당에 가면 접시나 찻잔이나 다 이가 빠져 성한 것이 없는 경우가 많다. 마찬가지로 각기 절절한 사연들을 간직한 그릇들은 이가 빠진 채로 내 부엌 찬장에 고스란히 다 들어 있다.

 언젠가 아련한 과거의 흔적을 찾고자 미국 LA인근 ‘나의 살던 고향’을 들렀던 적이 있다. 문을 열어준 집주인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니 선뜻 들어오란다. 엎치락뒤치락 쩔쩔매며 아이들과 지지고 볶던 그 시절 그 장면들이 집 구석구석에서 튀어나왔다. 큰아이의 무릎을 온통 피범벅으로 만들었던 정원 한구석의 튀어나온 돌멩이며, 작은애가 유난히도 좋아하던 미끄럼타기 계단이며, 때만 되면 잔뜩 늘어놓고 음식준비를 했던 부엌 카운터까지.

 거실 한 구석 벽난로에 걸려 있는 커다란 양말 속에 아이들 크리스마스 선물을 담는 남편의 모습도 보인다. 이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중 여섯 번째가 유난히도 삐걱거렸던 기억이 있어 살며시 올라가 보았다. 보수한 지 그리 오래되지 않았는가. 계단에서 향긋한 나무 냄새가 났다. 그런데 살며시 짚어본 여섯 번째 계단. 세상에. 영락없는 예전의 그 삐걱거림의 소음. 그 순간 갑자기 무섬증이 일어 서둘러 주인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는 그곳을 빠져나왔다.

 세월이 흘러 다 뜯어고쳤어도 여전히 삐걱대는 여섯 번째 계단의 비밀. 구조상 그 자리는 균형이 안 맞는 모양이다. 아련했던 그 소리의 기억은 잠을 설치게 만들던 소음이었고, 아이들 웃음소리 뒤에는 힘겨워하며 저 큰 공간을 청소하던 내가 있었다. 과거는 그저 과거일 뿐, 돌아가 보니 ‘기억 속 과거’가 아니었다.

 찬란했던 과거든지 우울했던 과거든지. 누구에게나 아련한 미련은 있을 터. 이런 ‘과거앓이’를 하던 일본이 요즘 수상하다. 쓰나미, 지진, 원전 사고, 불경기까지. 최악의 조건에서 더 이상 잃을 게 없다는 생각인가.

 총선에서 승리한 아베 신조를 우두머리로 하여 다시 과거의 일본으로 돌아가겠다는데. 하겠다는 것 중에서 제일 황당한 것은 일본군 위안부 강제동원을 인정한 ‘고노 담화’의 수정이다.

 절대로 이것만은 잊지 마라. 이거 잘못했다간 국제사회에서 처절하게 고립된다는 걸. 전쟁을 통해 남의 것을 짓밟고 훔치던 경험이 그리웠나, 주변 국가들의 약진이 부럽고 미치도록 샘이 났나. 평화헌법까지 뜯어고치고 ‘전쟁할 수 있는 일본’을 외친다는데.

 절대로 착각도 하지 마라. 모든 환경이 다 바뀐 지금. 소니의 찬란했던 옛날이나, 총칼 휘두르던 ‘전쟁질’이나. 모든 게 그리 호락호락하진 않을 게다. 과거는 그저 과거일 뿐이다.

글=엄을순 객원칼럼니스트
사진=김회룡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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