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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 저 밑바닥을 저리게 하는 우리 유물의 아름다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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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에서 태어나서 자란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축복이랄 수 있다. 이때 경주란 단순히 경상북도의 한 지명이 아니라 거대한 문화의 공간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경주에서 태어나고 자란 아이가 나이가 들어 문화유산을 찾아다닌다는 말도 설득력이 있다.

영남일보 문화부 남윤호 기자가 우리 문화유산을 둘러보고 쓴 『나를 사로잡은 천년의 울림』(해들누리)을 냈다는 사실이 전혀 어색하지 않은 까닭도 그 때문이다. 그가 문화유산에 매료된 과정과 깨우치게 된 사실을 알아본다.―편집자 주.

경주에서 자라셨다면 문화유산을 일상적으로 접하면서 오히려 다른 지방 사람들보다 더 문화재에 관심이 둔감해질 가능성이 많은데, 어떤 계기로 그 아름다움을 처음 깨닫게 됐는지요?

어렸을 때 윤경렬 선생이 지도하시던 어린이박물관학교에 다닌 것이 기초적인 소양이 되지 않았나 여겨집니다. 그 뒤 중학교 2학년부터 고등학교 1학년 때까지 불교학생회 활동을 하면서 경주 인근의 사찰을 찾아다니기도 했지요.

그 뒤 고2 때 화랑교육원에 1주일 동안 입소해 우리 문화의 우수성 등을 좀더 구체적으로 강사에게 듣게 됐지요. 입소일 중 하루 일과 문화재의 보고로 불리는 경주 남산을 종주하는 것이었습니다.

정기적으로 답사를 하신 계기는 무엇이며 언제부터입니까?
앞에서 말한 과정을 거친 뒤 경주라도 체계적으로 알아야겠다고 생각했지요. 남산을 비롯해 경주 일대의 유적지도를 구해 하나하나 각개격파 하듯이 유적지를 찾아다녔어요. 어떤 곳들은 몇 차례 답사했으나 못 찾아 아는 이들에게 떼를 써가며 동행을 요청하기도 했지요. 이런 답사는 대학 때까지 계속됐는데 다시 윤경렬 선생님을 만나게 된 것도 이 무렵이었지요.

신라문화동인회를 기웃거리며 말석에 앉아 술을 홀짝거리곤 했는데 하루는 술자리에서 윤 선생님이 남산에서 새로운 선각 불상을 발견했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그 위치가 어디냐고 여쭸더니 "너는 가봐도 못 찾는다. 그 불상은 아침, 저녁으로 햇빛이 비껴 비쳐야 겨우 보인다"며 장소를 가르쳐 줄 생각도 않더군요. 그래서 대뜸 "그 유물은 선생님의 것이 아니다. 누구라도 물으면 가르쳐줘야 할 의무가 있다"고 공박했지요.

그러자 선생이 "저 놈 누구야"하며 가르쳐주셨는데, 이것이 계기가 돼 선생님과 가깝게 지내게 됐지요. 물론 그 유물을 보기 위해 그 다음날 남산 기슭에서 야영하고 이른 새벽 산을 올라 그 유적을 본 에피소드도 있습니다. 그 뒤 대학원생 10여 명을 데리고 답사 안내를 했는데 정말 10여 미터 정도 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데도 그 가운데 70퍼센트 이상이 손으로 가르쳐줘도 보지 못했지요.

답사의 즐거움은 무엇입니까?
일상에서 벗어나 자유를 만끽하는데 있습니다. 이제까지 보지 못했던 것을 본다는 즐거움은 사람을 매료시킵니다. 또 같은 장소를 몇 차례나 다시 가기도 하는데 저번에 보지 못하고, 느끼지 못했던 것들을 새롭게 느낀다는 것은 행복 그 자체입니다. 그리고 이 같은 것들은 세월이 지나야 어느 수준에 이를 수 있는데 세월이 지나면서 점점 나의 주장과 생각을 표현할 수 있는 즐거움도 남다르지요.

일반인들은 생활에 바빠서 답사에 쉽게 나서지 못합니다. 기자 생활과 답사를 병행하는 건 상당히 어려운 일일 것 같습니다.
책머리에서도 밝혔지만 문화부 문화재 부분을 오래 담당할 수 있었던 것은 윗사람들의 배려이기도 했지만 나에게는 대단한 행운이었어요.

즉 취미생활이기도 한 답사를 일로 하고 있으니까 멋진 나날이 이어졌지요. 일요일이나 휴일, 가족과 함께 답사하고 아이들에게 이런저런 모습을 가르쳐 주는 것도 즐거움이었지요. 아이들이 초등학교 1∼2학년 무렵이 되자 폐사지에서 "여기 이상한 돌이 있다"며 뛰어 다니는 모습이 재미있기도 했고요.

잊혀지지 않는 답사지는 무엇이며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어느 곳 하나 잊혀지지 않는 곳이 있으랴마는 최고의 매력은 비오는 날, 안동 하회마을 부용대에서 마을을 내려다보는 것이지요. 그 뒤 그 아래 산 속에 있는 겸암정이나 옥연정사를 들러 서애 선생이 거닐던 길을 조금 걸어 보지요.

다시 장소를 옮겨 병산서원 만대루에 누워 빗소리를 들으면 속세를 떠나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주지요. 최근 하회마을을 찾는 관광객이 많은데 이 같은 답사 방법을 가르쳐 주어야 할 것 같아요. 그냥 마을을 쏘다녀 봐야 다리만 아플 뿐 하회마을의 참 맛은 전혀 느낄 수 없지요. 이들 지역을 먼저 다녀온 뒤 하회마을에 들러야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습니다.

또 모든 게 때가 있듯이, 늦가을에는 부석사의 뒷길을 놓치면 아깝지요.

폐사지에 대한 애정이 남다르신 것 같은데요. 폐사지에서 무엇을 느끼십니까?
어릴 적 소풍 갔을 때 보물찾기를 하는 느낌이랄까. 이곳 저곳에 버려져 있다시피 널린 유물에서 화려했을 때의 절 모습을 떠올리기도 하고 독특한 유물은 탁본을 할 수 있는 즐거움도 있지요. 또 행운이 겹치면 무늬가 있는 막새기와를 줍기도 하지요. 폐사지에서 삶의 흐름을 읽기도 하고요.

언제 경주의 아름다움을 느끼십니까?
아름다움은 시간과의 만남이 절묘할 때를 말하겠지요. 눈이 드문 경주에서 폭설이 쏟아질 때 고생고생하며 올랐던 용장사. 벚꽃이 만발한 봄날, 반월성에서 친구와 술잔을 기울이는 밤. 여름철 친구와 천렵을 해 얼큰한 매운탕을 즐길 때의 진평왕릉.

계림의 잔디밭에 누워 고목을 쳐다보며 그 썩은 가지에서 새싹이 돋아나는 장면을 볼 때. 단풍이 가득한 가을날, 암곡이나 황룡 골짜기에서 가재잡이를 할 때 등 경주의 아름다움은 끝이 없어요.

우리나라 문화유산의 특징을 어떻게 설명하시겠습니까?
이번 책의 분류 방법과 후기에도 표현했지만 우리 문화유산의 특징은 자연주의 정신과 익살이 배어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 익살은 또한 자연주의의 또 다른 표현이기도 합니다.

무한한 자연의 존중, 그 속에 깃든 인간, 이런 것들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이는 조선의 도학정신에서 큰 영향을 받았겠지만 그 이전의 미의식에서도 관통하고 있는 것입니다. 조선의 성리학이 중국보다 더 발전을 한 것은 바로 이 같은 의식이 우리 정신의 밑바탕에 있었던 때문이기도 합니다.

윤경렬 선생과의 관계에 대해 말씀해주세요.
저를 가장 염려하고 아껴 주시던 선생님이었습니다. 사모님께서는 저를 둘째아들이라고 부르셨지요. 20대에는 자주 선생을 찾았지만 신문기자가 된 이후에는 일년에 두세 차례 밖에 찾아 뵙지 못했습니다.

선생이 타계했을 때는 수백 명의 제자들을 대표해 선생의 가족과 함께 화장한 유골을 수습하기도 했지요. 저희 부부의 주례선생이기도 했고요.

윤경렬 선생의 성품을 잘 드러내는 일화가 있다면 말씀해주세요.
처음 만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선생과 처음으로 둘이서 술잔을 나눴지요. 그때 선생은 60대 후반이었고 저는 20대 초반이었어요. "남선생, 술 한 잔 하시게"하며 잔을 나누다, "선생은 먼저 난 사람이 선생인데, 후생이라고 불러야겠다"고 호탕하게 웃으셨지요.
그러다 "팔씨름이나 해 볼까"하고 손을 내미시는가 하면, 함께 거나하게 취해 농로 길을 걸으시다간 고무신을 벗어 쥐고 "저 전봇대까지 달리기 한번 하자"며 뛰시기도 했지요.

1987년 겨울이었던 것 같군요.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있었는데 함북 주을 출신인 선생은 항상 고향을 그리워하며 눈물짓곤 했지요. 이날도 둘이서 작은 소반을 앞에 두고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는데 대통령 선거가 어떻게 될 것 같으냐며 안타까워했지요.

선생은 YS와 DJ가 함께 노태우를 대적해야 한다며 가슴 아파했지요. 그래서 그렇게 될 것이라고 내가 이야기하자 "그렇게 되야 할거야"라며 눈물 반 술 반으로 술잔을 기울였지요. 그리고 선생은 자신이 직접 작사한 '누나야'를 비롯해 많은 노래를 함께 불렀지요.

그리곤 또 울음. -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담은… 선생의 노래솜씨는 일품이었는데 나의 친구나 가까운 사람들을 데려가면 함께 술잔을 나누며 그 연세에도 불구하고 노래를 불러줬지요. 주변 사람들은 모두 감탄을 하고…

언젠가 찾았을 때, 어디서 술을 선물받으셨던 모양인데 이미 그 술은 다 비운 상태였던 모양입니다. 함께 고량주를 나누다 그 목 긴 술병을 다시 가져와 "여기 옮겨 담아 마시자. 술 따르는 소리가 얼마나 좋은지…"라며 기뻐하시기도 했습니다. 항상 기뻐하시는 선생의 모습은 너무나 보기 좋았습니다.

책에서 윤경렬 선생의 배려로 성덕대왕 신종을 타종하는 행운을 누리셨다는 글을 읽었는데, 그 종소리를 어떻게 표현하실 수 있겠습니까?
종명은 원음(原音)이라고 표현합니다. 세상의 모든 소리를 담은 하나의 음악이지요. 가슴 저 밑바닥을 저리게 한 뒤 온 몸을 전율케 하는 그 종소리는 정신을 아득하게 합니다. 위대한 예술은 모두 하나로 통한다고 할까요. 석굴암 본존불 옆에 기대어 불상을 쳐다볼 때 느끼던 그 아득함. 점차 무한히 줄어드는 자신을 느끼게 합니다.

문장이 아주 감칠맛이 넘칩니다. 혹시 문학가를 꿈꾸셨나요?
물론 어릴 때부터 문학을 꿈꿨지요. 초등학교 4학년 땐 박목월 선생 백일장에 동시부 장원을 하기도 했고요. 그 뒤 시 공부를 열심히 하기도 했고 대학 때부터 소설을 쓰려고 마음먹었으나 입사 시험에 바빠 그만 두었지요. 그 동안에 영남대에서 주최한 전국 대학생 독후감 공모에 당선되기도 했지요. 지금도 소설가의 꿈은 조금 남아 있다고 할 수 있을까요.

요즘 관심사는 어떤 것입니까? 또 책을 펴내신다면 어떤 책을 펴내실 생각이십니까?
요즘은 거의 퇴계에 빠져 있어요. 두 달 여의 준비 끝에 다음 주부터 전면 컬러로 『영남일보』에 연재할 예정입니다. 성인 퇴계가 아닌 퇴계의 인간적인 면모를 살펴 볼 예정입니다. 이 일이 끝나면 지난 1999년 대구경북 기자상을 수상하기도 했던 '영남의 정자'와 합본, 우리 조선사회를 이끌었던 유교의 한 면모를 살펴볼 수 있는 책을 펴내고자 합니다. (김중혁/ 리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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