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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작불 고두밥의 고집 … 효모 놀랄라, 낯선 이 오면 문 닫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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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면

그곳의 시간은 다르게 흘렀다. 전북 정읍 태인합동주조장 송명섭(55) 대표를 만나니 정신 없이 달려가는 서울의 시간은 참 부질없어 보였다. 취재차 찾아간 나에게 그가 처음 보여준 것은, 술과 양조장이 아니라 호남제일정(湖南第一亭)으로 꼽힌다는 고색창연한 정자 피향정(披香亭)이었다. 정자 아래에는 꽤 넓은 연못이 펼쳐져 있었고, 다 시들었어도 여전히 무성한 연잎들이 한여름 드높았던 연꽃 향기를 말해주고 있었다. 그곳 유지들은 아직도 고대 사회의 전통을 이어 만장일치로 의결을 한다고 했다. 1957년생이라며 첫 상면부터 ‘동생 삼자’고 ‘쌍팔년도식’ 작업 멘트를 날리고, 질문에 즉답을 하지 않고 1분쯤 뜸을 들였다가 온갖 비유적 수사로 답을 하는 우회적 화법까지 송명섭 대표가 있는 태인의 시간은 확실히 서울의 시간과는 다른 속도로 흐르고 있었다.

옹기 술독에서 술이 발효되고 있다. 발효가 왕성하게 진행되는 동안에는 뽀글뽀글 소리까지 난다. 술이 익으면 이를 자루나 체에 걸러 누룩찌꺼기를 분리해 낸다.

 내가 ‘송명섭 막걸리’를 처음 맛본 것은 2, 3년 전이었다. 말을 더 보탤 것도 없이 바로 내가 찾고 있던 그 막걸리 맛이었다. 그동안 내가 원한 막걸리의 조건은 딱 두 가지, 달지 않으면서 진한 막걸리였다. 나는 정말 달착지근한 요즘 막걸리에 유감이 많다. 내가 대학 다니던 시절만 해도 이토록 막걸리가 달지는 않았다. 텁텁한 밀가루막걸리가 1990년을 기점으로 매끈한 쌀막걸리로 바뀐 것까지는 좋았다. 그런데 포천막걸리와 서울막걸리, 다소 덜 달던 고양 원당막걸리까지 점점 술이 달아졌다. 하긴 술만 그러하랴. 떡도, 과자도, 모두 경쟁이라도 붙은 듯 달고 자극적으로 바뀌니 얄팍해진 우리 입맛 탓이라 할 수밖에 없다.

완성된 ‘송명섭 막걸리’. 다른 막걸리와 달리 거무티티한 것들이 떠 있는 것은, 겉밀로 만든 전통누룩으로 술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두루 아다시피 막걸리의 단맛은 합성감미료를 넣기 때문이다. 지금은 주로 아스파탐을 쓴다. 합성감미료 대신 설탕을 쓰면 생막걸리 속의 생 효모가 유통 중에 활발히 활동해 술 맛을 변화시키므로 효모가 분해할 수 없는 합성감미료를 쓰는 것이다. 막걸리에 들어가는 첨가제는 그것만이 아니다. 인공향료나 색소를 쓴 제품도 있어서 식품첨가물 난을 열심히 읽어봐야 한다.

막걸리를 거르고 난 찌꺼기인 술 지게미.

 달지 않고 진한 막걸리를 먹고 싶어서 누룩을 사다가 막걸리를 담가본 적도 있었다. 경동시장에서 누룩을 사다 책에 적힌 비율대로 쌀과 물을 섞어 항아리에 담갔다. 첫 시도는 실패였다. 동네 식당 아줌마가 시음을 해보더니만 덜 뜬 누룩을 썼기 때문이란 진단을 내렸다. 시장에서 파는 누룩은 대부분 수입 밀을 재료로 해 제대로 뜨지 않은 것이 태반이라는 것이다. 그럼 어쩌라고요? 집에서 누룩까지 띄울 수는 없잖아요? 아줌마의 처방은 간단했다. ‘술약’을 함께 넣으란다. 즉 인공배양해 건조시킨 효모를 사다 첨가해야 한다는 것이다. 시키는 대로 했더니만 전혀 달지 않고 걸쭉한 술이 되기는 했다. 하지만 맛은 별로였고, 어떤 때는 새콤하게 시어버리기도 했다. 이렇게 저렇게 몇 번을 해보다가 결국 집어치웠다.

 이런 내가 술로 무형문화재 기능보유자가 된 명인 송명섭 대표를 만났으니 얼마나 입이 근질근질했겠는가. 그런데 그는 술 담글 고두밥 찔 생각도 안 하고 누이동생 타령 하면서 눙치고만 있었다. 길고 느린 호흡의 그의 화법이 싫지 않았던 것은 슬로푸드인 막걸리를 마시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진하면서도 감촉이 부드러워 목 넘김이 좋고, 구수한 곡물의 자연스러운 맛이 일품이다. 단맛이 없으니 막걸리 특유의 털털한 자연의 향취가 그대로 살아났다. 술잔에 감도는 누룩 향은 전통누룩을 쓴 술에서만 만날 수 있는 향취였다.

 술맛은 누룩이 좌우한다. ‘송명섭 막걸리’는 공장에서 순수 배양한 효모를 첨가하지 않고 오로지 전통 방식으로 만든 누룩만을 사용한다. 메주가 콩을 띄운 것이라면, 누룩은 밀을 껍질째 빻아 꽁꽁 뭉쳐서 띄운 것이다. 공기 중의 야생 효모를 집적해놓은 전통누룩은, 향취가 풍부한 옛 술 맛을 낼 수 있다는 장점은 있지만 잡균의 오염으로 술 맛이 들쭉날쭉할 수 있다. 그에 비해 순수 배양된 강력한 효모는 이런 우려가 없는 대신 술 맛이 단순하고 얄팍해진다. 대부분의 막걸리는 인공적으로 배양된 효모를 쓰고 나중에 인공감미료까지 첨가하는 것이다.

잘 쪄진 술밥을 시루에서 꺼내는 송명섭 대표.

 송명섭 대표는 전통누룩만을 쓰는 것도 모자라 아예 누룩을 직접 띄운다. 전통누룩도 공장제 상품을 쓰면 간편할 것이다. 수입 밀로 띄운 것은 싸고, 국산 밀로 띄운 것은 두 배 값이다. 그런데 그는 직접 누룩을 띄운다는 것이다. 누룩의 질이 중요해서 이런 귀찮은 일을 하는 사람이 온갖 농약을 쳐서 키운 수입 밀을 재료로 쓸 리는 없다. 그래도 궁금해서 또 물었다. “우리 밀을 사다 쓰시겠지요?” 답은 다소 놀라웠다. 직접 밀 농사를 짓는단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주재료로 쓰는 쌀 역시 대부분은 자신이 키우고 모자라는 것은 인근 농가의 것을 쓴다.

 ‘송명섭 막걸리’의 자랑이 쌀과 누룩과 물, 이 세 가지 외에는 아무 것도 넣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의 막걸리에는 태인에서 나는 쌀과, 태인에서 키운 밀로 직접 만든 전통누룩 그리고 태인의 물, 이 세 가지만 들어가 있는 셈이다. 이것이 바로 풍부하면서도 깨끗한 맛의 송명섭 막걸리의 비결인 것이다.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할까? 그는 계량된 레시피를 지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이 유일한 기준은 아니라고 했다. 세상의 모든 것이 계량 가능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증명되지는 않았으나 경험상 옳다고 확신하는 방법으로 막걸리를 만든다. 고두밥을 찔 때에도 값싸고 편한 가스 불을 쓰지 않고 장작불을 쓰고 술은 반드시 옹기 술독에서 발효시킨다. 왜냐고? 맛이 달라지기 때문이란다. 심지어 술이 발효되는 곳에 낯선 사람이 드나들면 탈이 난다고까지 했다. “미친 소리라 할지 모르지만 효모들도 낯선 사람을 만나면 깜짝 놀라요. 늘 보던 주인이 아니니까 경계하고 움츠러드는 거예요. 그때 초산균들이 그 틈을 차고 들어가 술 맛을 망치는 거죠.” 그렇다고 그가 합리화된 계량의 방법을 무시하는 건 아닌 듯했다. 작업장 한 면은 플라스크와 비커 등 온갖 계량 도구들로 꽉 차 있었다. 단지 이런 근대적 계량이 세상 전부를 설명해줄 수 없음을 겸허하게 인정하는 것일 뿐.

증류주를 만들 때 쓰는 소주 고리. 송 대표는 증류주인 약술 ‘죽력고’ 제조 기능을 지닌, 전라북도무형문화재 기능보유자이다.

 물론 처음부터 그의 이런 막걸리가 호평을 받은 것은 아니다. 그가 지금의 방식으로 막걸리를 만든 것은 90년대 중반이었다. 수입쌀로 막걸리를 만들라는 정부의 권장사항에 따라 수입쌀을 썼다가 술을 망쳤다. 창고에 처박아둔 수입쌀은 놀랍게도 쥐와 벌레도 잘 먹지 않았다. 그걸 보고 여태껏 관행적으로 해오던 막걸리 양조 방식을 포기하고, 지금의 송명섭 막걸리를 만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시큼털털하다고 외면 받았다. 아내는 사람들이 이 맛을 싫어하니 도로 감미료를 넣자고 했다. 그래도 고집스럽게 버텼다. 그러기를 몇 년, 소문을 타고 외지에서 주문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제 ‘송명섭 막걸리’는 매니어들이 인정하는 술이 되었고, 이 술이 있느냐 없느냐가 막걸리 전문점의 수준을 가늠하는 기준이 되고 있다.

 그래도 외지에서 이 술을 맛보기가 그리 편한 것은 아니다. 한 박스 단위로 주문을 받기 때문이다. 일반 가정에는 참 부담스러운 양이다. 유일한 방법은 김치냉장고에 보관하며 3주 안에 먹는 것이다. 하지만 그게 여의치 않아 술이 남아도 별 걱정이 없다. 그냥 실온에 두고 공기유통만 잘 시켜주면 여러 용도로 쓸 수 있다. 우선 맛술로 해물과 고기요리에 쓰면 좋다. 제품화된 달착지근한 맛술이나 조리용 와인보다 쓰임새가 더 광범위하다. 더 오래 놓아두면 막걸리는 식초로 바뀐다. 산도는 다소 약하지만 진짜 순수한 양조 식초가 만들어지니 초고추장이나 소스, 혹은 희석한 음료로 제격이다. 이런 식초는 몇 년 묵히면 향취가 점점 좋아진다. 그래서 막걸리는 기호식품이기도 하지만 식재료이기도 한 것이다.

 이렇게 다양하게 쓸 수 있는 것은, 모두 합성감미료나 첨가제를 쓰지 않고 순수하게 술을 빚은 덕이다. 천천히 흘러가는 시간의 힘은, 자연을 존중하는 태도에서만 제 힘을 발휘한다.

글=이영미 대중문화평론가
사진=신동연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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