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병오원단의 첫 귀빈 험프리 미부통령|그의 방한의의와 [프로필]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2면

「휴버트·H·험프리」미국부통령은 [마르코스] 비율빈 대통령의 취임식에 참석한 후 귀로, 그의 부인 및 32명의 수행원과 함께 1월1일 밤 새해 첫 외국손님으로 우리 나라를 친선 방문한다.
지난 봄 박대통령이 미국을 방문했을 때 구두로 [험프리] 부통령의 방한을 초청한 일이 있으나 이번 그의 방한은 「비공식」, 「친선사절」의 사명을 띠고 우리 땅을 밟는 셈이다.
미국부통령으로서는 [리처드·닉슨] 씨에 이어 두 번째로 한국을 찾는 중량급 인사이기도한 그의 체한 일정은 꼭24시간-. 이 짧은 일정동안 [험프리]부통령은 박대통령을 비롯한 정부요로와 만나 월남사태, 한·일 국교수립으로 새로이 전개될 극동의 한·미·일 삼각체제 등 당면한 여러 가지 한·미 공동 관심사를 합의하게 될 예정이다.
[험프리]씨에게는 이번의 극동여행이 부통령 취임 후 처음으로 시도해 보는 본격적인 외교 사명이기도 하다.
미합중국의 제2인자요, 상원의장이기도한 [험프리] 부통령이 직접 한국을 보게되었다는 것은 최근 미국부통령의 지위가 과거 어느 때보다 중요시 되어가고 있는 때문인 만큼 여러모로 의의가 크다고 하겠다.
[험프리] 부통령이 이번 극동순방에서 어느 정도의 외교적 솜씨를 보이느냐에 따라 앞으로 [존슨] 대통령이 외교 과제를 [험] 부통령에게 일부 넘길 수 있느냐를 결정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 한다.
[험프리] 부통령은 미국 민주당 진보파의「리더」격-풍부한 국제감각과 높은 식견을 지닌 이란 정평이 있는 그지만 요즘 월남문제에 관한 한 「존슨」 대통령과 발을 맞추어 강경 일변도이다.
[험프리] 부통령의 생애는 파란만장의 연속이었다. 1911년 [사우드·다코타] 주 [웰리스] 시에서 한약방 주인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18세 때 [미네소타] 대학에 입학, 그러나 당시 미국을 엄습한 대불황 때문에 학업을 중단하고 집안 일을 돌보았다.
복교·휴학을 세 번이나 거듭한 끝에 10년만에 학사모를 썼다. 39년 동대학원에서 [뉴·딜]정책에 관한 논문으로 석사학위.
정치에 비상한 매력을 느낀 그는 제2차대전이 막바지에 이른 43년 [미네아폴리스] 시장 선거에 첫 출마, 고배를 마시고 말았다. 45년 [험프리]씨는 다시 시장선거에 출마하여 당선, 시정개혁에 매끈한 솜씨를 보였다.
40년 상원의원에 당선, 민주당내에서 진보적인 이론을 내세워 동료의원들의 인정을 받아 상원 내에서의 민주당원내 부총무 등 지도자급으로 [클로스업] 되었다.
기발한 [아이디어]를 끊임없이 안출해 내 [아이디어·맨]으로 정평이 있는 그는 부지런하기로도 상원의원 중 으뜸이며 또한 열렬한 웅변가이기도하다.
1분 동안에 2백50단어를 거침없이 말해 치우는 그는 [케네디] 대통령 당시 민주당정권의 중요정책이었던 평화군단, 핵 실험금지 조약 등 각종 사회 복지정책을 안출해 낸 [아이디어·뱅크]였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