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가불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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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합방 때 어떤 대신이, 합방 찬성파를 만나면 불가불, 가라고 대답하고 반대파가 조르면 불가, 불가라고 비분했다는 얘기가 있다. 작금 양년에 한·일 친선 [무드]의 물줄기를 타고 활짝 핀 [사꾸라]족의 시조라고 할까.
중앙일보 독자들이 뽑은 지난 한해동안의 10대 [뉴스] 중엔, 아무리 얌체 같은 [사꾸라]라도 불가, 불가라고 잘라서 개탄할 수밖에 없는 흉사가 많았다. [메사돈] 사건, 어민 납북 사건, 광주압사사건이 그렇다. [메사돈] 사건은 주범 몇이 아직 잡히지 앉아서 꺼림칙하고, 납치 당했던 어민 중엔 아직 돌아오지 못한 몇 사람이 있다. 압사사건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고 언제 어디서 또 일어날지 모르는 민족의 수치.
그러나 10대 [뉴스] 중엔 보고 겪은 사람에 따라 불가, 불가라고 할 사람이 있고, 불가불, 가라고 주장할 입장이 있을 수 있는 사건이 몇 가지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모두 한·일 문제와 관련된 일이었고 보면 을사년의 감회가 자못 깊다.
학생 [데모]와 위수령이란 일연의 사건 중 오래 우리 기억에 남을 대목은 무장 군인들이 [현행범]을 잡는다고 [캠퍼스] 속으로 뛰어든 일. 당한 쪽에선 불가, 불가였지만, 뛰어 든 쪽에선 불가불, 가라고 나와서 흐지부지됐다. 언론인·정치인 [테러] 사건도 대동소이였다. 당한 쪽은 물론, 국론이 일치해서 불가, 불가라고 단정한 것 같지만, 거국일치로 범인들을 잡아야할 중요한 시기에 [공포감을 주기 위해서 한 짓]이었으니 [테러]라고 할 것이 못된다는 말이 나와서 알쏭달쏭 했다. 결국 이 사건은 완전한 미궁에 빠진 채 망각의 피안으로 사라져 간다.
10대 [뉴스]의 으뜸은 한·일 국교정상화-그토록 피맺히게 갈라섰던 국론이 비준서 교환을 일기로 깨끗이 사라졌다고 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불가불, 가와 불가, 불가의 양론의 뒤끝이 아직 가시지 않은 채 해를 넘긴다. 교제를 트기가 무섭게 남의 어장을 훑어가고 독도에다 선을 긋고 북괴와의 왕래 길을 터주고하는 일본의 처사는 하루속히 아물어야 할 상처에 빙초산을 뿌리는 격. 한 많은 한해, 역시 을사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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