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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년회풍경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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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레테」강이란 것이 있다. 그것은 현실의 강이 아니라 신화 속의 강이다. 누구나 이 강을 건너게 되면 과거의 기억을 잊어버리게 된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망각의 강…. 슬프고 외롭고 억울하고, 그래도 조금은 기쁘고, 조금은 행복했던 인간만사의 모든 사연들을 백지로 화하게 하는 강…. 결국 「레테」강은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죽음이야말로 모든 사실을 영원히 망각하게 하는 강물일 것이다.
원죄때문일까? 인간의 현실엔 괴로운 일이 더 많다. 행복한 일보다도 불행한 일이 한결 더 친숙한 인문의 벗이 되어왔다. 그러기에 사람들은 망각하기를 좋아한다. 망각이야말로 고해의 병을 고치는 최상의 양약이다.
그러기에 연말이 되면 사람들은 으례 망년회란 것을 갖는다. 한해의 괴로움을 한잔 술로 잊어버리자는 게다. 가난한 사람들은 선술집에서, 돈 있는 사람들은 또 고급요정에서…. 비록 모이는 그 자리는 다 달라도 「레테」강을 건너려는 그 마음만은 다를 게 없다. 구원을 풀자. 묵은 오해나 마음에 쌓였던 불쾌감을 불사르자. 그렇게 해서 사람들은 망년회장으로 간다.
하지만 망각한다는 것은 역시 어려운 문제인 모양이다. 망년회풍경을 가만히 관찰해 보라. 처음엔 서로 감정을 풀자고 제법 화기애애하게 연회가 시작된다.
그러나 몇잔 술이 들어가고 서로들 과거의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하면 으례 끝판은 주정 반 싸움반으로 끝나기 마련이다.
『지나간 일이었지만, 사실 그때 자네가 말야…』 대개 이런 투로 망각하자던 옛 기억들이 되살아난다. 이것이 비위를 건드리고 묵은 상처를 건드리게 한다. 『말하려 하지 않았지만…』의 전제가 실은 더 많은 말을 하게되고 오해를 풀자던 사연이 거꾸로 또 하나의 더 큰 오해를 준다.
대체로 망년회는 그렇게 끝난다. 그래서인지 요즈음의 밤거리에는 주정꾼의 싸움광경이 부쩍 늘어났다. 정말 살아서는 「레테」강을 건너지 못하는가? 잊어버리고싶다. 정쟁의 구원에서 사사로운 가정의 알력까지 모두 잊어버리고 싶다. 「레테」강이여! 이 고뇌의 생으로 흘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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