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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금을 없애자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1면

통금 없는 하룻밤을 무사히 지낸 다음날 아침이면 으례 통금이 무엇 때문에 있는가를 생각해 본다. 통금을 풀어서 유사했던 기억이 없는 것이 이상하다.
통금제도에 대한 찬반양론은 해볼 대로 다해 보았다. 이론이야 어떻게 되었든, 기왕에 통금을 풀어본 경험에 비추어 통금이라는 일종의 위헌을 정당화할 이유가 없다. 통금이 치안유지나, 간첩색출에 도움이 되었다는 예보다는 오히려 통금 없는 밤이며, 고장의 평온이 더욱 눈에 뛴다. 그 반면 이제 저물어 가는 이 해와 함께 완전한 미궁에 빠져버린 여야「테러」가 통금의 보호아래서 저질러졌다는 사실이 있다.
「크리스머스」나 신년에 통금을 풀어 준다는 것은 한편으로 고맙긴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통금제도의 억지를 스스로 시인하는 처사라는 인상이 짙다. 「크리스머스」와 신년은 바로 민심이 가장 들떠있고, 오열이며 범죄가 마음놓고 판을 칠 수 있는 무방비일이기 때문이다. 통금이 필요하다면 바로 그러한 날을 위해서 있어야 한다는 것이 상식론이다.
36년 동안 일인의 사슬에 묶여 살다가 20년이란 장구한 세월을 통금이란 사슬에 다시 묶여서 허둥거려왔다. 『「선인」과 명태는 몽둥이 뜸질을 해야 제구실을 한다』는 왕년의 철학이 아직도 살아 있는지도 모른다. 또 하도 오랫동안 묶여서 살아 온 백성이니까, 사슬을 풀어 주기 전에 자유를 슬기롭게 즐기는 훈련을 쌓아야 한다고 걱정하는 사람들이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자유라는 것은 수영의 이치와 같아서, 자유를 더욱 많이 누려서 비로소 그것을 올바르게 즐기는 법을 배울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얘기를 다 알아 들을 수 있으면서도 통금철폐의 결과를 두려워하는 마음이 가시지 않는 다면, 요즘 유행하는 식의 단계적 철폐를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벌써 충북과 제주에선 통금이 없어졌다. 이게 12월달의 이틀만이 아니라 양력, 음력의 모든 명절날에, 그리고 모든 국경일에 통금을 풀어보자. 그 다음에 격일, 마지막으로 반년단위로 풀어보자. 그러다 보면 우리도 통금 없는 달세계에 너끈히 연착-연착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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