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구려 불꽃같은 '386'의 哀歌(애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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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인 발언이 강한 연극을 주로 공연해 온 서울 대학로 연우소극장에서는 '불티나' 가 공연 중이다. 올해 창단 5주년을 맞은 극단 백수광부(白首狂夫) 의 작품이다.

백수광부는 임영웅씨 밑에서 오랜동안 조연출을 했던, 연세대 극회 출신의 이성열씨가 1996년 독립하면서 만들었다. 창단 작품 '햄버거에 대한 명상' 을 비롯해 '키스' '굿모닝□ 체홉' '고래가 사는 어항' 등 독특한 문제작들을 꾸준히 선보였다.

이 극단의 올 세번째 작품인 '불티나' 는 386세대가 겪는 시대의 아픔과 우울을 담았다. 지난해 좋은 평가를 받은 '이(爾) ' 를 쓰고 연출했던 연극원 출신 김태웅씨의 신작을 이씨가 연출했다. 두 사람은 30대 후반의 386세대다.

연극은 지금은 '불티나' 라이터 불이나 애걸하는 80년대 운동권 출신 주인공 병수를 통해 어제와 오늘에 이르는 세태의 변화를 야유한다. 가끔은 도가 지나쳐 허무주의적인 자조(自嘲) 로 흐르는 것이 눈에 거슬리지만 풍자는 시종 세련됐다.

80년대 민주화 투사였던 병수는 사법고시 8수생. 이번 합격자 발표 명단에서 '병수' 라는 이름을 발견하고 "됐구나" 싶었는데, 아뿔사. 힙합 청바지에 요란한 두건, 이어폰을 꽂은 같은 이름의 새파란 신세대에게 한방 먹고 만다.

"저도 병수인데요. 수험번호가 틀리잖아요. " '왕고참' 병수는 또 떨어진 것이다.

심란함을 달랠 겸 욕망의 배설구로 찾는 16세 소녀와의 동침, 이런 무기력한 남편 병수에게서 탈출을 꿈꾸는 아내, 여기에 한때 '동지' 였던 친구들의 세속적인 삶이 엮이면서 연극은 급류를 탄다.

출세한 개그맨(윤재) .전도양양한 사법연수원생(동현) 이 현 세태를 상징한다면, 아직도 '혁명' 을 꿈꾸는 추배는 화석같은 80년대의 유물로 다가온다.

그러나 연극은 어느 편을 강요하지않는다. 병수가 요즘의 시민운동에서 87년 6월 항쟁의 잔영을 읽는다면, 윤재에게 그것은 키보드에서 이뤄지는 '컴퓨터 혁명' 에 불과하다. 그만큼 시대는 다원화했다.

이런 묵직한 주제를 연극은 시시때때로 가벼운 말장난을 섞어가면서 유쾌하게 풀어낸다.

때론 주관객인 신세대들의 말초적인 감각에 영합하려는 '아양떨기' 가 엿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그 웃음 뒤에 숨어서 한번 멈칫하게 만드는 짙은 우울이야말로 '불티나' 의 매력이다.

이런 식이다. 정부(情夫) 가 있는 아내에게 병수는 NGO가 무어냐고 묻는다.

'비정부 조직' 이라고 답하자 그녀에게 내뱉는 한마디. "너는 GO(정부) 냐?" '불티나' 는 사랑도 가고, 친구도 가고, 세월도 간 채 이처럼 개그만이 남은 시대에 대한 애가(哀歌) 인 것이다.

고른 실력으로 어울린 전수환.박미현.정승길.박수영.이준혁.정우혁 등의 연기도 감칠맛 나고, 단순화했지만 표현력이 떨어지지 않은 무대(장치) 활용도 좋다. 386세대라면 '내 이야기' 라며 동질감을 느끼고 극장을 찾을 만한데, 관객 중에 그 주인공들이 별로 눈에 띄지 않는다며 극단은 울상이다.

10월 14일까지. 02-766-14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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