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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위수령 발동|을사 년 정국의 분기점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1면

거리에는 「데모」의 물결이 노한 파도처럼 휘몰 리고 있었다.
무장 군인이 고대에 뛰어들고 이어 또 군화가 연세대 안을 휩쓸던 그날 8월26일 상오, 국방부에서는 김성은 국방장관이 기자회견을 갖고 『우려되는 「데모」 사태에 대비, 오늘부터 위수령을 발동, 서울 근교에 있는 야전군 예하 제 6사단 일부 병력이 서울에 투입되고 있으며 사태 진전에 따라 병력의 증강이 있을 것』이라고 발표했다.
학생 「데모」를 저지하기 위해 수도 경비사령부 병력뿐만 아니라 야전군 소속의 1개 사단병력 동원은 김 국방의 위수령 적용 발표와 함께 이루어졌다.
이 발표가 있은 바로 뒤 국방부의 한 고위간부는 황급히 장관실로 뛰어들어갔다.
들리는 바로는 이 자리에서 전연 의외의 사태에 아연, 수도경비 사령부의 병력을 증강하는 것이 옳았을 뻔했다는 소신을 밝히고 기왕 이렇게 되었으니 요식 절차를 갖추는 게 어떠냐는 의견을 말했다 한다.
국방부 수뇌들 사이에는 당초부터 위수령의 적용을 반대하고 수도경비 사령부 설치령에 의한 병력증강을 주장하는 의견도 없지 않았다는 얘기가 있었으나, 그러나 사태의 급변에 따라 국방부 안의 이견은 조경이 이루어진 것이다. 바로 그 즈음 서울특별시 공보실장은 윤치영 시장이 국방부 장관에게 병력동원을 요청한바가 없다고 말했다.
위수령 제12조에는 지방장관인 서울시장이나 도지사가 병력동원을 요청해야만 위수령을 발동하도록 규정되어 있다.
서울특별시 쪽의 태도는 그러나 몇 시간안가 표변했다. 같은 날 하오에 이르러서 윤치영 서울특별시장은 상오에 소급해서 위수령 적용을 군에 요청했다고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선포 없는 계엄하 사태로 몰아넣은 이 위수령의 발동이 이루어진 뒤 서울시는 무거운 분위기에 휩싸이고 문교장관의 갱질, 세 예비역 장성의 입건, 「데모」 주동학생·배후 조종자 등에 대한 검거, 고·연대에 대한 휴교조치 등 일련의 강경한 「데모」 저지 책이 실천에 옮겨졌다.
위수령 발동에 의해 동원된 제6사단 일부병력이 서울 청량리 밖에 진주하기는 했으나 이 병력은 서울시내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국방부로서는 위수령 발동으로 병력이 동원됐다는 사실만을 알려 위압감을 「데모」 학생들에게 불어넣음으로써 「데모」의 물결이 가라앉기를 노린 듯 서울시내는 수도경비사 병력만이 치안유지에 나섰었다는 얘기다.
물론 사태가 더 악화하였더라면 이 야전병력은 서울시내에서 병기를 사용하거나 현행범을 체포하는 등 좀더 물리적인 영향력을 행사했을지 모른다.
공화당에서도 이 위수령의 발동은 전연 알지 못하고 있었고 국무회의에서도 전연 보고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위수령의 발동은 관계부처를 연결하는 선에서 지극히 조심스럽게 다루어지고 짜낸 「데모」 저지 책인 것 같다.
정부가 한·일 조약 및 협정의 국회 비준동의 과정에서 일어날 학생·야당 등의 반발을 미리 예견, 이에 대한 대책을 은밀하게 수립해 온 것은 사실이며 위수령의 발동도 이 과정에서 마련된 것을 분명하다.
위수령 발동으로 학생 「데모」는 진압이 되었으나 위수령이 할퀴어 놓은 상처는 계엄령 선포이상의 커다란 고통의 기억을 국민에게 안겨준 것은 부인하기 힘들 것 같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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