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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풍경화를 그리다보면 하루해가 지나간다는 유두연씨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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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멧새가 삐익삐익 운다. 북망산을 스치는 바람은 더 쓸쓸하고 차갑다. 그 기슭으론 벌판이 뻗고, 추수가 지난 논바닥은 이를데 없이 황량하다. 겨울의 고요한 들은 참말 슬프기까지 하다.
이 풍경은 유두연씨의 무릎위에도 있었다. 흑연필로 그린「스케치」한폭! 아니, 그의 무릎위에 있는 풍경화엔 산너머로 구름이 두어 덩어리 두둥실 떠간다.
저편하늘엔 없는 구름인데-.
『구둠이야!』빙그레 웃으며 그는 볼을 움직인다. 『「구둠」이라니요?』혹시나 싶어 물어본 이쪽의 말.
『구둠 이라니까. 구둠·구둠이 도와』
구름이 좋다는 것이다. 그 몇마디가 그렇게 힘에 겨워 혀를 몇번이나 깨무는지…. 모처럼의 따스한 볕을 받으며 그는 쪽마루에 앉아 망우리 산등성이를 그리고 있었다. 쪽대문소리에 어찌나 반가왔던지 사람도 보기전에 커다란 미소를 띠고있다.
1963년 3월18일 유두연씨가 강단에서 쓰러지자 서라벌예대생들은 연기인가 싶기까지 했다. 그의 「영화개론」은 그처럼 연출과 연기가 얽힌 열정강의였다. 유씨는 그만이었다. 그의 숨결은 잦아들고 있었다. 학생들은 줄달음을 쳐서 의사를 불렀다. 그리고는 이제껏 망연자실한 채 3년의 병상세월을 보냈다. 기억도, 언어도, 환상도, 유쾌한 휘파람도 다 잊어버리고 그저 허망한 나날…. 유순한 웃음과 때때로 북받치는 슬픔과 「흑흑…」흐느낄 눈물과…그것 뿐. 그가 젊은 한 시절엔 웅변도 썩 잘했다는 외고모 유덕순여사의 회상한마디에는 눈물이 지난다. 일본 경응대문학부를 졸업하고 현해탄을 건너올 때 경리해주의 유지들은 그의 미래를 선망했다. 영화비평을 쓰더니 6·25동란을 치르고는 「시나리오」를 연달아 26편이나 집필했다.
58년, 그가 「메거폰」을 처음 든 「유혹의 강」이 개봉되자 화려한 박수들이 그에게 쏟아졌다. 「조춘」(59년) 「사랑의 십자가」(59년) 「카츄샤」(60년)등 천여편의 「필름」 은 그의 각광을 받아 만원사례. 61년은 운명의, 그림자 같은 것이 그에게 다가왔다. [파멸]을 감독하고 나서는 정작 그가 그 지경을 당했다. 재기의 안간힘으로 「어딘지 가고 싶어」(62년촬영)라더니‥
그가 갈곳은 아무데도 없었다. 사람들은 술이라고도, 과로라고도 하며 그를 진단한다. 아마 두 가지가 다 겹쳐 그를 쓰러뜨리게 했는지도 모른다. 고혈압에 의한 반신불수에 망실증에.
어느 날, 아내는 그의 옷을 빨다가 정신을 잃고 말았다. 유씨의 속옷 갈피에서 이상한 종이 쪽지 하나! 연필에 침을 묻혀 떠듬떠듬 쓴 글씨.
『의숙이(아내의 이름), 그만 가오. 산다는 것이 이렇게 힘이 들어서야 견디겠소. 이게 뭐요. 미안하오. 혼자 가오』
채의숙씨는 손이 후들후들 떨렸다. 그것은 유서가 아닌가? 2년만에 겨우 여명같은 의식 이 동트자 그는 허망한 인간조건에 절망하고 말았다. 아무것도 남은 것이 없지 않은가. 살던 집도 ,아내의 고운 얼굴도, 아이들의 건강한 모습도 다 어디가고 그는 병상의 「반인」.유씨는 불끈 가슴을 친다. 『이게 뭐야! 무어냐 마디야 (말이야) !』한 주먹은 쾅쾅 그의 가슴을 자꾸 친다. 자의식이 파도치는 것일까.
담배 8개비, 냉수 몇 잔, 장기한판, 그리고 「스케치」한장…그러면 하루가 가고 또 그런 하루가 오고, 그런 매일, 매일 『다이더(잊어) 버뎠어(버렸어). 가듬(가슴)엔 단뜩(잔뜩)타(차)있는데』. 누구의 가까운 이름도 그는 기억하지 못했다. 『가슴엔 잔뜩있는…』그 이름들이-.
서울 인수동(1599의 10번지) 창도없는 사글세방에 누워 긴긴날들을 보내다가 요즘엔 망우동(480번지) 외고모댁에서 산을 보며, 하늘을 보며 그래도 신선한 날을 보낸다. 방안엔 큼지막한 금붕어 한 놈이 뻐금뻐금 그와 말을 한다. 그의 유일한 친구 그리고는 멧새가 끼득끼득 나는 소리, 먼 산에서 돌 깎는 정소리….
『이봐, 가디말아. 당기(장기) 한판 두어』 사람이 그리워 그의 싸늘한 왼손은 못내 놓질 않는다. (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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