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을사년 정국의 분기점|민중당의 급선회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1면

을사년의 [8·15]는 조국광복을 되새기는 날이기도 하지만 한·일협정비준안이 국회에서 야당과 학생들의 반대열풍속에서 통과된 전야이기도 하다.
정국을 파국점으로 내달리게 한 [8·15]광복절전야통과-엄밀히 말하면 8월14일에 국회통과된 [8·14]선은 누가 설정했나….
한·일협정비준안 찬반을 둘러싸고 국회가 격랑속에 휘말려 표류되고 있는 7월20일 아침 9시 나용균 국회부의장실에는 박순천 민중당대표최고위원, 나부의장, 이상철 홍익표 조재천 지도위원과 이들과는 어울리지 않게 공화당의 정구영당의장이 모여 앉아 머리를 맞대고 소근소근-.
정구영 조재천씨등 몇몇 여·야 실력자를 제외하고 이 자리에 참석한 야당간부들은 물론 대부분의 여·야 간부들은 민중당의 진로를 대선회시킨 여·야영수회담(박·박회담)이 열리리라고는 미처 생각지 못했다. 그처럼 [박·박회담]은 쥐도새도 모르게 추진되었다. 나부의장실에서 박순천 대표최고위원의 일방적인 여·야 영수회담 참석통고가 있은 한시간 뒤 청와대에서 공화당총재인 박대통령과 박순천대표최고위원의 여·야 영수회담이 열렸으며 ▲헌정질서를 유지하고 극한적으로 대립된 상태와 한·일 협정비준동의를 둘러싸고 조성된 극한상황을 지양하기 위해 51회 국회(7월12일 소집)를 21일로 폐회한다 ▲한·일협정비준동의안과 월남파병동의안을 다루기 위한 52회 국회를 곧 소집한다는 등에 합의했다.
[박·박회담]은 이런 합의사항외에도 김형일의원(민중) 석방등 몇가지 정치문제를 해결했으며 8월 비준국회에서의 여·야결전을 광복절 전후에 끝맺는다는 이른바 [8·14통과선]에 묵계했다는 이야기가 꼬리를 물고 오고갔다. 민중당온건파는 공화당의 [매터도]에 의한 교란작전이라고 묵계설을 부인했으나 강경·온건 양당의 불신감정은 점고되어 분당을 재촉질했다.
박대표최고위원은 처음 여·야영수회담의 주선을 몇차례 거부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민중당 강경·온건 양파의 불신감정과 알력이 당내에 팽배하여 당연이 풍전등화의 위기에 직면하고 있는 시기에 영수회담에 참석할 수 없다는 이유를 그는 내세웠다. 7월12일 제51회 임시국회가 소집되나 정부·여당의 한·일협정비준안 강행통과방침과 당운을 걸고 결사 저지하겠다는 야당방침이 맞서 비준안은 국회보고조차 어렵게 되어 국회는 며칠씩 공전했다.
7월14일밤 공화당의 기습작전으로 비준안이 발의되기전 국회의장실에서는 이효상의장의 주선으로 국회공전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박순천 정구영 김성곤씨등 여·야영수회담이 열렸는데 이 자리에서 여당간부들은 청와대영수회담을 마련할 뜻을 비쳤으나 7·14난투로 성숙되지 못했다. 청와대측은 여당간부들의 요청을 들어 박순천씨에게 두번이나 전화를 걸고 박대통령과의 면담을 요구했다.
박씨의 경화된 결심이 풀려져 박대통령과의 면담쪽으로 돌아서게 한데는 18일 정동 미대사관저에서 열린 박순천씨와 [브라운] 주한미대사와의 단독회담의 결과라고 보는 관측이다. 미국은 한·일관계의 조기정상화를 측면에서 지원해 온 만큼 여·야영수회담의 실현을 희구해왔다.
공화당의 실력자 K의원은 19일 박대통령의 친서를 갖고 박씨와 접촉, [박·박회담]의 터전을 굳혀 놓았으며 20일 정구영씨의 연락으로 박씨는 청와대행 [지프]에 몸을 실었다.
어떻든 박·박회담을 계기로 여·야는 7월 국회에서 잠정적인 휴전을 선포한뒤 8월 국회에서의 결전을 위한 태세를 재정비했다. 정부·여당이 목표한 [8·15선]은 민중당을 이끈 박순천씨의 탈당표명소동과 [한·일협정비준동의안예심특별위]의 민관식위원장의 정계은퇴성명등으로 몇 번이나 흔들릴 뻔했다. <강>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