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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군의 한·일 만화보기] 디스토피아

중앙일보

입력

모든 문화 장르가 그렇듯 만화도 현실을 담아내는 재미난 거울이다.

'박군의 한.일 만화보기' 는 비슷한 소재를 다루는 한.일 두 나라의 작품을 놓고 만화에 비친 세상사와 세태를 살펴보는 일종의 토크쇼다.

이야기를 듣다 보면 이들이 작품으로서도 성공할 수 있었던 비결도 자연히 드러나게 될 것으로 기대한다. 격주로 싣는다.

태평양을 건너온 전파가 실시간으로 전해주는 영상에 '만화같다' 는 생각이 절로 듭니다. 아니, 만화 이상입니다. 머릿 속은 혼란스럽기만 합니다. 지금 저기서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요.

역사에 기록된 파괴와 살상의 사건들은 동시대에는 그 내밀한 이면이 드러나지 않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1980년 5월의 광주가 그랬고, 일본의 관동대지진이 그랬습니다.

그래서일까요.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들이 주로 테러나 재난 그 자체를 다루는데 비해 한.일의 만화들은 역사의 이면을 파고 들거나 다가올 재앙을 예견하는 데 관심을 기울입니다.

TV 뉴스를 보다 윤태호의『야후』와 우라사와 나오키의『20세기 소년』을 다시 꺼내들었습니다. 『야후』는 80~90년대 한국의 아픈 상처들을 냉정한 시선으로 파고듭니다. 성수대교 붕괴.아시아나 항공기 추락.삼풍 백화점 붕괴….

무너지는 상가 건물 지하에서 압사당하는 아버지의 최후를 지켜보는 소년. 그는 도대체 누구를 향해 어떻게 분노해야 하는지조차 알지 못한 채 '수도경비사령부' 라는 조직에 자신을 던져버립니다.

『야후』에서 벌어지는 대형 참사들은 전체주의의 폭력성과 개인의 억압된 폭력 본능이 만나는 날선 교차점입니다.

『20세기 소년』은 20세기를 지나온 우리 세대가 21세기에 대해 갖는 불길한 예감입니다. 세계 정복을 꿈꾸는 악당을 물리치는 놀이에 열중하는 꼬맹이들. 그들이 청년이 됐을 때 상상은 현실이 돼 세계를 덮칩니다. 하지만 현실의 그들에겐 상상에서처럼 지구를 구할 능력이란 없습니다. 하지만 21세기의 권력자로 등장한 '친구' 에게 20세기의 소년들은 무모한 도전장을 던집니다.

두 작품에서 보여주는 미래상이란 우리가 꿈꿨던 '멋진 신세계' 와는 거리가 멉니다. 『20세기 소년』에는 '본격 과학모험만화' 라는 이름이 붙어 있지만, 여기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건 성큼 다가온 디스토피아의 징후입니다.

『야후』의 소년에게 전체주의는 때론 정의의 얼굴로 때론 불의의 얼굴로, 혹은 정의와 불의를 가늠할 수 없는 베일에 싸인 두려운 존재입니다.

다시 TV로 시선을 옮겼습니다. 상식을 뛰어넘은 테러리스트들의 놀라운 상상력(!) 에서 비롯된 이번 참사의 이면에는 또 얼마나 놀라운 진실들이 감춰져 있을까요. 난무하는 음모론처럼 어떤 거대한 존재가 도사리고 있는 건 아닐까요.

반인륜적인 테러와 그 테러를 부른 강대국의 독선, 미국 시민들의 무고한 희생과 지난 반세기 동안 중동에 뿌려진 아랍인들의 피. 가쁘게 대립하는 현실의 혼돈스러움은 만화가 감지하고 있던 불안한 미래상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습니다.

우리 현실의 끝은 과연 절망적인 파국뿐일까요. 만화가 내놓는 마지막 장은 늘 용서와 화해라는 인간애의 승리 아니었습니까. 오늘 만나본 두 편의 만화와 우리의 현실 모두, 혼돈을 밝히는 이성의 승리로 결말짓기를 간절히 바래봅니다.

◇ 필자 박성식은=1969년생. 91년 도서출판 대원 공채 1기로 만화계 생활을 시작한 뒤『부킹』『해킹』『찬스』 등의 만화잡지 창간에 참여했다.

현재 부천만화정보센터 만화PD학교 강사며 만화기획자로 일하고 있다. '박군' 은 그의 필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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