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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를 관조하는 거시적 사관|이보형 동국대교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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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토인비」교수의 이름은 2차대전전에 있어서도 서양고대사 특히 「그리스」사의 전문가로서 또 영국의 왕립국제문제연구소에서의 연구활동을 통하여 국제문제의 전문가로서 학계에서는 이미 알려진지 오래였으나 오늘날과 같이 그의 이름이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기는 전후의 일이다. 이에 있어서는 그의 필생의 거작인 「역사의 연구」가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러므로「역사의 연구」를 전후의 저작으로 아는 사람도 많으나 실은 전12권중 반수에 해당되는 6권은 이미 전전에 간행되어 많은 사람의 주목을 끌었으며 이 거작에 대한 구상은 「토인비」연구실에 의하면 1920년경에 벌써 싹트고 있었다고 한다. 이와 같이 「역사의 연구」는 오랜 역사를 갖고 있는데 그것이 전후에 이르러 갑자기 각광을 받게되고 이에 따라 교수의 이름 또한 세계적으로 된 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그것은 그의 거작을 바치고 있는 사관이 특이하고 또 그러한 사관이 전후의 혼란된 시기에 어떤 공감을 자아낼 수 있는 요소를 지니고 있었다는데 있다 하겠다.
여기서 그의 사관의 기본적 특징을 요약해 보면 첫째로 역사연구의 단위를 민족이나 국가에 두지 않고 「여러 사회의 통합체」인 문명에 두고 있다는 것, 둘째로 문명이라는 것은 시간적으로 전후 연속의 관계를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철학적으로는 동시대적이며 병행적이라는 것, 세째로 문명은 발생·성장·양의 과정을 밟아 나가는데 그 과정을 해명하는 관건은 「도전과 응전」의 이론이라는 것, 넷째로 역사란 「이 세계라는 협소한 무대에서 진행되는 신의 계획의 실현」이라는 것이다. 결국 오늘날 우리인류가 겪고 있는 고뇌는 우리만의 것이 아니라 과거의 모든 문명이 겪었던 고뇌이며 이러한 고뇌를 통해서 얻어지는 지식이야 말로 신이 의도한 대사업에 한발한발 다가가는 최고 지대의 진보수단이라는 것이다. 이 점에 있어 그의 사관은 확실히 불안과 위기의 시대라고 하는 현대의 인심에 크게 호소되는 바 있었다.
전후 그는 「역사의 연구」의 마지막 부분을 집필하면서 세계의 여러 대학에 초빙되어 강의를 하고 이것을 토대로 많은 저작을 내놓았으며 한편 때에 따라 중요한 국제문제에 대하여도 시사성이 풍부한 견해를 발표하였다. 그의 저작과 시사문제에 대한 견해를 보면 그의 역사연구는 연구자체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보다 큰 과제에 도전하는데 필요한 수단으로서 봉사하고 있는 것 같다.
그 과제란「인류는 어디로?」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그는 연래 쌓아온 해박한 역사지식을 바탕으로 인류의 미래를 관조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사학도들 사이에는 「토인비」교수의 사관, 방법론을 둘러싸고 커다란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하버드」대학의 「부린톤」교수의 말을 빌면 그 논쟁의 정도는 현재의 세계분쟁에 못지 않게 치열하다고 한다. 사실 직업적 사가에는 반「토인비」파가 많으며 한편 「토인비」교수는 이들을 「안티노미안스」(도덕률 불요론자) 라고 부르기를 좋아한다.
그러나 일반식자나 특히 「매스콤」은 사학에 있어서의 논쟁과는 달리 여전히 그에 대하여 커다란 매력을 느끼고 있는 것 같다. 그것은 그가 미래를 관조하는 사학이라는 데에서 또 역사를 거시적 안목에서 보고 대담한 해석을 내리고 있다는 데에서, 미시적 안목에 사로잡히고 있는 것 같은 직업적 사가로부터는 얻을 수 없는 어떤 무엇을 그로부터 얻고 있기 때문이 아닐지. <이보성=동국대학 교수>
◇토인비교수 약력
1889년 런던에서 탄생
l9l1년 옥스퍼드대학 졸업
1912년 모교에서 고대사 강의
19l5년 1차대전중 외무성 정보국에서 일함
I919년 파리 강화회의에서 영국정부의 중동관계 전문위원으로서 활약, 또 런던대학 교수에 취임
1925년 영왕실 국제문제연구소의 연구부장
1937년 영국아카데미 회원으로 선출됨
1939년 영왕실 국제문제연구소의 교수
1943년 영외무성 조사부장
1946년 파리국제평화회담에 영국대표단의 일원으로 출석
1955년 런던대학 명예교수(현재에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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