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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취재일기

불륜 스캔들의 포로가 된 한국 외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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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7면

박승희
워싱턴 특파원

데이비드 퍼트레이어스 전 미 중앙정보국(CIA) 국장의 불륜 스캔들이 열흘을 넘기고 있다.

 한국인으로서 이 막장 드라마를 지켜보는 건 점점 고역이 돼 간다. 스캔들의 주인공 중 한 명인 질 켈리(37)가 한국의 ‘명예영사(Honorary Consul)’란 불편한 사실 때문이다. ‘Honorary Consul 1JK’라고 적힌 번호판을 차에 달고 다니며, “한국과의 사업을 원하면 도와줄 수 있다”고 과시하고 다녔다는 얘기가 나왔을 때만 해도 견뎠다. 하지만 ABC방송이 치명타를 날렸다. 한국과 석탄가스화 사업을 모색하던 애덤 빅터란 회사 대표와의 인터뷰에서다. 빅터는 켈리가 한국 정부에 부탁해 40억 달러의 계약을 성사시켜 주겠다면서 8000만 달러를 요구했다고 폭로했다. 자신을 “CIA 국장이 소개해 한국 명예영사가 됐다”고 한 켈리는 “한국 이명박 대통령과도 연결해 줄 수 있다”고 말했다고 한다. “통상 로비 금액은 100만 달러인데 상궤에서 벗어났다”며 빅터가 거절하는 바람에 로비는 실패로 끝났다.

 켈리가 8000만 달러가 아니라 80만 달러를 불렀으면 태평양 건너 미국의 스캔들은 임기 말 한국을 뒤흔들어 놓을 뻔했다.

 문제는 CIA 국장에서 시작된 스캔들이 이미 켈리의 부적절한 처신으로 옮겨붙었다는 점이다. 그럴 때마다 ‘한국 명예영사’란 단어는 단골로 등장한다. CNN 등 미 언론들은 한국 정부가 어떻게 해서 켈리를 명예영사로 임명했는지 수수께끼라고도 보도하고 있다. 켈리가 살고 있는 탬파의 지역 언론들은 그녀가 명예영사를 뒷 배경 삼아 사업 교류를 했다는 제보가 쏟아지고 있다고도 경고했다.

 하지만 수수께끼는 사정이 이런데도 외교부가 켈리를 명예영사에서 해임시키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다 보니 전 미국에 15명밖에 없는, 그것도 지역에 신망이 두터운 인물들로 고르고 골라 선정되는 명예영사에 켈리가 어떻게 임명됐는지를 놓고 의혹만 증폭되고 있다.

 ‘명예영사의 임명 등에 관한 규정’에는 ‘직무범위를 넘어 대한민국에 불이익을 초래하는 행위를 했을 때’ ‘명예영사로서 적당하지 않다고 인정되는 사유가 있을 때’ 언제라도 해임할 수 있도록 돼 있다. 하지만 주미 대사관 관계자는 “미국 정부의 수사가 아직 다 끝나지 않았다”며 해임 결정을 미루고 있다. 그러는 사이 한국 외교는 미국 불륜 스캔들의 포로가 돼 골병이 들고 있다. 공교롭게도 미 국방부는 ‘아직 수사가 다 끝나지 않았는데도’ 켈리에 대한 군 출입 허가를 일찌감치 14일자로 박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