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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 집 펴낸 순정만화가 박희정 인터뷰

중앙일보

입력

인생에도 대차대조표가 있다면 만화가 박희정(31) 에게 올 상반기는 흑자였다. 지난해 인기리에 연재하던 『마틴 앤 존』이 잡지 폐간 등의 이유로 도중하차했다. 하루 아침에 일하는 터전이 없어져 당황스러웠지만 해가 바뀌면서 좋은 일이 잇따랐다.

우선 서울 국제만화애니메이션 페스티벌(SICAF) 이 국내 대표급 만화가 10명의 단편을 모은 'SICAF 컬렉션' 에 선정됐다. 허영만.김수정.이두호 등 내로라 하는 선배들과 어깨를 견줬다. 어리둥절했다.

그러더니 이번엔 순정만화가들의 꿈이라 불리는 일러스트집을 펴냈다.

『시에스타』(시공사.1만8천원) . 스페인어로 '낮잠' 이라는 뜻이다. 일러스트는 그림 실력이 고스란히 드러나기 때문에 작가들이 도전을 매우 꺼리는 영역이다. 결코 적잖은 분량인 1백여점의 그림. "섬세하고 화려한 그림으로 보는 이를 매혹시킨다" 는 만화계의 평가가 무색치 않다.

24일 만난 박희정은 "마음의 빚을 하나 덜어낸 기분" 이라고 했다. 단편 『서머 타임』으로 데뷔해 이례적으로 흑인 주인공을 등장시킨 『호텔 아프리카』로 떠올라 『마틴 앤 존』까지 올해로 8년째다.

'최다 표지 작가' 라는 타이틀, 그리고 '독보적인 신인' 이라는 찬사. 경력에 비해 작품 수가 얼마 되지 않는다는 것이 은근한 압박이었고, 이름을 항상 따라다니는 이같은 꼬리표들이 부담스러웠던 것도 사실이다. 작가라면 한번쯤 자신을 정리해보고 싶은 시기에 때마침 작품집을 낸 것이다.

박희정의 그림은 여느 순정만화가들의 그것과는 분명 구별된다. 일설에 따르면 『오디션』의 천계영이 그녀의 그림을 보고 만화계 입문을 결심했다고 한다.

만화계에서는 아무리 작은 부분이라도 수작업을 고집하는 그녀의 '장인 정신' 에서 차별화의 비결을 찾는다. 심하면 한장 그리는데 사흘 밤낮을 꼬박 새기도 한다.

그녀가 가장 큰 영감을 받은 작가는 독일의 동화 일러스트레이터인 크빈트 부흐홀츠. 국내에 『순간을 채색하는 내 영혼의 팔레트』라는 책이 나와 있다. 부흐홀츠가 맘에 들어 한때는 파스텔 그림에만 열중하기도 했다.

"삶을 관조하는 자세가 맘에 들어요. 신비롭고 어딘지 세상과 거리를 유지하는 느낌이라고 할까요. "

일러스트집의 제목은 엘렌 바킨.가브리엘 번이 주연한 영화에서 따왔다.

"그 영화는 제목과 똑같은 분위기에요. 자신이 죽은 줄도 모르고 꿈 속을 걸어다니죠. " 이미지 중심으로 작업하는 스타일이라 영화를 보면서 아이디어를 많이 얻는다고 한다.

좋아하는 국내 작가는 황미나.김혜린.이강주다. 특히 데뷔하기 전에는 황미나의 그림을 열심히 따라 그렸다고 한다.

올해 말께 서울 아티누스 갤러리에서 전시회도 열 생각이다.

다른 장르에 비해 상대적으로 독자층이 좁은 순정 만화가 대중을 만나는 자리다.

그녀처럼 틀을 벗어나 훨훨 날고 싶어하는 작가가 많을수록 우리 만화계가 우물 속처럼 깊어지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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