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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성공하려면] 6. 행사로 바쁜 대통령은 실패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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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미국의 지미 카터 대통령(재임 1977~81)은 취임 1년 뒤 "대통령이 시간 관리를 제대로 못한다"는 비판을 받자, 자신의 집무시간을 정밀 분석하라고 지시했다.

그 결과 집무시간의 절반 이상인 57.5%를 참모나 장관들과 국정 현안을 논의하는 데 할애한 것으로 나타났다. 외국 방문객 접견과 공식 행사 등 의전적 성격의 일에는 10.5%의 시간을 썼다. 그러고도 카터는 시간관리를 제대로 못한다는 비판을 받았다.

빌 클린턴 대통령도 비슷한 경험이 있다. 취임 초기 공식 일정과 각 비서관들이 잡는 일정에 치어 제대로 국정을 챙기지 못하자 비서실장이 '비상'을 걸었다.

"대통령의 모든 일정을 지금부터 제로 베이스에서 다시 짠다. 듣고 토론하고 생각할 시간을 최우선으로 한다."

미국 대통령들의 일정 관리가 이처럼 시간 단위로 분석.관리될 수 있는 것은, 대통령의 모든 일정이 기록.보관.공개되기 때문이다. 며칠 몇시 몇분에 누구와 통화를 했다는 것까지 다 기록에 남는다.

클린턴 때 르윈스키 성추문 사건이 낱낱이 추적될 수 있었던 것도 그같은 기록 덕이었다.

이는 대통령의 일거수 일투족이 국민에게 공개돼야 하고 국민은 그를 감시할 수 있어야 한다는 원칙에 따른 것이지만, 이 때문에 카터처럼 대통령의 시간 관리에 대한 체계적 분석도 가능해진다.

일본도 총리 일정이 공개된다. 비록 전날 일정을 다음날 아침에 공개하는 것이긴 해도 분 단위까지 자세히 공개된다. 몇시 몇분 어느 식당에서 누구를 만났으며, 어디에서 이발을 했으며, 몇시에 관저로 돌아갔다는 식이다.

반면 우리나라 대통령 일정은 경호상 이유로 대외비에 부쳐진다. 사후에 자세히 공개되지도 않는다. 그래서 대통령이 누구를 만나 무슨 일을 하며 하루를 보내는지 제대로 파악할 수 없고, 따라서 제대로 관리할 수도 없다.

역대 대통령의 일과를 대략적으로라도 분석해 본 유일한 자료는 김영삼(YS) 전 대통령 때인 94~95년 2년 동안의 공식 일정 분석뿐이다. 당시 청와대 민정비서관을 지낸 김충남 미 하와이대 동서문제연구소 객원연구원이 개인적으로 만든 연구자료다.

그나마 이는 시간 단위 분석이 아니라 건별 분석이다. '뭘 했다'이지 '어디에 얼마나 시간을 썼다'가 아닌 것이다.

그러고도 YS의 일정 중 절반은 의전적 성격의 행사로 채워진 것으로 나타났다.

2년 간 YS가 소화한 일정은 8백16건. 이 가운데 전체 일정의 49.8%인 4백6건이 기념식.현장시찰.리셉션.식사.음악회 등 의전적 행사였다. 국무총리는 68차례에 걸쳐 대통령에게 보고했지만 경제부총리.통일부총리의 보고횟수는 각각 37회와 29회에 그쳤다.

특히 장관 보고는 10회에 불과했다. 국무총리의 행정실무 장악력에 한계가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너무 적다는 비판이 제기된다. 실제로 97년 말, 외환위기가 시시각각 닥쳐오던 때에도 강경식(姜慶植) 당시 경제부총리는 YS를 아무 때나 만나기가 어려웠다.

결국 그는 매일 이른 아침에 비서실장이 대통령을 만나는 시간을 비집고 들어가 현안을 보고할 수밖에 없었다.

미국과 한국의 대통령 일정에 이토록 차이가 나는 것은 왜일까.

"대통령이 안해도 될 일에 시간을 빼앗기고 정작 해야 할 일에는 제대로 시간을 할애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대통령이 바빠서 장관들이 대통령을 만나기가 어렵다는 것은 말도 안된다. 미국 대통령은 골프도 치고 휴가도 즐기면서 할 일은 다한다. 역설적으로 대통령은 바빠선 안된다."(양수길 전 OECD 대사)

과연 어떤 일들이 대통령이 안해도 될 일들일까.

최선정 전 보건복지부 장관은 '알맹이 없는 행사들'을 우선 꼽는다.

"이름은 거창한데 내용과 알맹이가 거의 없는 행사들이 수두룩하다. 청와대 영빈관에 1백여명씩 불러다 놓고 질문할 사람들을 미리 짜놓고 거기에 대한 답변까지 다 시나리오대로 하는 행사를 대체 무엇 때문에 하는지 알 수가 없다. 그러니 국무회의든 무슨 회의든 대통령이 참석하는 회의에서는 대화와 토론이 사라져 버린 지 오래다."

요컨대 형식적.의전적 행사만 없애도 대통령이 국정을 생각하고 장관.참모들과 터놓고 만날 시간은 충분해진다는 이야기다.

빛이 나는 일은 대통령 행사에서 결정돼야 하고, 힘이 실려야 하는 일도 대통령 행사에서 지시가 나와야 한다고들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간 각 부처나 청와대나 마찬가지였다. 다들 잘못이라고 말들은 하면서도 그걸 고치는 것은 '고양이 목에 방울 달기'였다.

양수길 전 대사는 유럽연합(EU)에서 시행 중인 '권력 하부 이양의 원칙'을 거론한다. 장관선에서 결재할 수 있는 일은 애초에 대통령에게까지 올라가지도 못하게 하라는 것이다.

민주당 김근태 의원은 '통치자 시간의 기회비용'을 강조한다. "국민에게 대통령의 일정을 공개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대통령의 한 시간은 나라의 한 시간이라고 생각하고 일정을 짜는 것이다.

그 시간에 다른 일을 하면 정작 중요한 일은 못하고 넘어간다. 대통령은 결재와 공식행사는 최소한으로 줄이고, 대신 듣고 토론하고 생각하는 시간을 많이 가졌으면 한다."

<특별취재팀>
김수길 부국장, 이하경 정치부 차장, 김종혁 국제부 차장, 이세정.고현곤.송상훈 경제부 차장, 이영종 통일외교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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