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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요리 제대로 선보이고 싶어 레스토랑 열었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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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기학 셰프는 “사람들이 요리를 즐길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자신의 역할”이라며 “누구나 부담없이 프렌치 요리를 맛볼 수 있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프랑스 요리도 부담 없이 먹으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아무 격식 없이, 특별한 미각을 자랑하지 않아도 즐길 수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누구나 그가 만든 스프와 오리 콩피를 사랑하게 된다. ‘진짜’ 프렌치 요리를 알리고 싶다는 임기학 셰프다.

붉은 차양이 드리워진 테라스 자리. 작은 체크무늬 담요가 의자마다 놓여 있다. 파리 샹제리제 거리의 레스토랑에 온 듯한 착각을 일으키게 하는 곳, ‘레스쁘아 뒤 이부(이하 레스쁘아)’다. 실내의 테이블 벽면에는 프랑스 요리 레시피 북과 각종 요리 잡지들이 꽂혀 아기자기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점심식사를 위해 레스토랑을 찾은 두 여성은 메뉴판을 펼치기도 전에 어니언 수프를 주문한다. 달콤한 양파의 풍미와 짭쪼롬한 치즈 맛이 온몸에 온기를 전하는 이 요리는 이 곳의 시그니처 메뉴다. 레스쁘아는 임기학 셰프가 만든 요리를 즐기려는 이들로 평일에도 만석이다.

프랑스 요리를 선보이는 임 셰프의 ‘레스쁘아’가 지난 8월 초, 삼성동에서 청담동으로 확장 이전해 이목을 끌고 있다. 터를 옮긴 곳은 나무와 하늘, 테라스를 갖춘 운치 있는 건물인 청담동 ‘테이블2025’다. 입구에 들어서자 정면에 보이는 주방 쪽으로 눈이 간다. 매장 전체 규모의 절반이 주방이다. 주방 식구도 8명이나 된다. “인테리어 시공을 할 때 작업하시는 분들이 ‘정말 주방을 이렇게 크게 할거냐’고 재차 물어 보시더라고요. 홀을 넓게 만들어 테이블을 하나라도 더 놓는 게 좋겠지만 요리 욕심에 주방 설비를 여유 있게 했습니다.”

이름도 삼성동 시절 ‘레스쁘아’이던 것을 ‘레스쁘아 뒤 이부’로 바꿨다. ‘에스쁘아’는 불어로 희망이라는 뜻이고 ‘이부’는 ‘부엉이’다. 기존 비스트로 콘셉트이던 공간에 브래서리(맥주 등 주류를 곁들여 즐길 수 있는 식당) 접목시켜 ‘밤’의 이미지를 덧붙여 지었다.

제대로 된 재료와 레시피 ‘진짜’ 프렌치 요리

레스쁘아는 2008년 지루한 코스의 프렌치 메뉴가 주를 이루던 시절 문을 열었다. 임 셰프가 선보이고자 한 것은 ‘진짜’ 프랑스 음식이다.

‘진짜’라는 틀을 벗어나지 않기 위해 많은 책을 보고, 제대로 된 프랑스 음식을 맛보기 위해 파리나 뉴욕으로 꾸준히 일년에 한두 차례 여행을 떠난다.

그는 철저한 원칙과 노력을 통해 요리 실력을 인정받고 있지만, 실은 타고난 스타셰프의 운명을 지녔는지도 모른다. 할아버지 임광식 씨는 일본에 ‘식도원’을 차려 야끼니꾸(일본식 숯불구이)를 최초로 소개, 일본 외식업계에 한 획을 그은 인물이다. 임 셰프의 부모님도 일식집과 호텔을 경영했다. 요리를 가까이 하며 자란 덕에 어릴 때부터 다양한 음식을 즐기며 자연스럽게 미각이 발달했다. 대학에서 성악을 전공했지만 요리에 대한 꿈은 저버릴 수 없었다. 결국 대학 졸업 후 미국의 유명 요리 학교 ‘존슨&웨일스대’로 유학을 떠났다.

우등으로 학교를 졸업한 후 그가 찾은 곳은 뉴욕에 있는 프렌치 레스토랑 ‘DB 비스트로’였다. 미슐랭 3스타 레스토랑 중 하나인 ‘다니엘’을 운영하고 있는 셰프 ‘다니엘 블뤼’의 또 다른 레스토랑이다. 스타주(요리를 배우기 위해 레스토랑에서 무급으로 일하는 단계)로 들어가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요리를 배우고 싶다’는 내용의 이메일을 셰프에게 보냈다. ‘한번 와 보라’는 답장이 왔다. 2004년 9월 매 주말 이틀간 견습하는 스타주 생활을 시작했다. 석 달쯤 지났을까. 밤 10시를 넘긴 시각, 셰프 올리비에 뮬러가 “이 식당의 메뉴를 하나만 골라 보라”고 했다. 요리를 테스트하는 건가 싶어 고민을 하다 즉석에서는 만들 수 없는 요리인 ‘돼지족’을 골랐다. 트러플 향을 맡으며 늘 맛을 궁금해하던 메뉴였다. 대답을 들은 셰프가 돼지족을 요리해 접시에 담아주며 “웰컴 투 DB! 내일부터 인턴으로 일하라”고 말했다.

“정식 채용을 축하하는 요리였던 겁니다. 하루 14시간 동안 묵묵히 잡일을 했고, 다시 오라고 한 사람도 없었지만 매주 찾아가 똑같은 과정을 반복한 것을 인정받은 거죠. 주방에 서서 맛본 그 돼지족은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요리였습니다.”

그가 DB비스트로에서 일한 기간은 1년 3개월. 이후 한국으로 돌아와 그랜드 하얏트 서울의 ‘파리스 그릴’, 파크 하얏트 호텔의 ‘코너 스톤’ 등 정통 프렌치 레스토랑에서 경력을 쌓았다. 다시 뉴욕으로 돌아가 ‘카페 그레이’에서 1년 정도 일했다. “다른 사람에게 배워야 발전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순간 ‘나 스스로에게 배워도 되지 않을까’ 싶더라구요. 그리곤 한국으로 돌아와 레스쁘아를 열고 사람들에게 제 요리를 선보이게 됐습니다.”

프렌치 식문화 제대로 소개하고 싶어

레스쁘아는 격식만 차리는 어려운 프렌치 레스토랑이 아니다. 연인과 가족, 동료들과 가벼운 한끼 식사도 가능하다. 프렌치 요리는 비싸다는 생각도 편견일 뿐이다. 이탈리안 레스토랑에서 일품 요리 하나 먹는 것과 가격 차도 얼마 나지 않는다. 혼자 와서 느긋하게 프렌치 요리를 즐기고 가는 이들도 종종 있다. 대표 메뉴인 어니언 스프 외에 와규 꽃등심 스테이크와 크림 브륄레는 멀리서도 찾아와 즐길 정도로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관자와 아귀, 대구, 랍스터를 넣어 만든 부야베스 역시 가을에 잘 어울리는 메뉴다.

임 셰프는 “음식을 즐기는 것은 문화를 즐기는 것과 같다”고 강조한다. 처음부터 최고급 레스토랑에서 격식만 배운다면 자연스럽게 문화를 익힐 기회를 얻을 수 없다는 것이다. “프랑스 음식이란 무엇이고, 식당 장르의 엔트리급인 ‘비스트로’가 어떤 장르인지 제대로 소개하고 싶어 레스쁘아를 열었습니다. 5년 정도 지나니 손님들의 기호에 맞춰 자연스레 성장해 고급 비스트로인 ‘갸스트로 비스트로’ 분위기로 자연스럽게 변모했죠. 저는 그들이 즐길 수 있게 도왔을 뿐입니다. 먼 훗날, ‘프랑스 음식을 한국에 제대로 소개한 사람’으로 기억될 수 있으면 좋겠다는 바람입니다.”

글=하현정 기자
사진=김진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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