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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은택의 중국 만리장정] 웃통 벗은 ‘미스터 어깨’ 도움에 가슴 뭉클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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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4호 24면

허난(河南)성 퉁바이(桐栢)현의 허난불교학원을 가면 건물 몇 개층 높이의 미륵불이 웃으면서 맞이한다. 5대10국 시대의 ‘보따리중(布袋和尙)’ 계차(契此)를 본뜬 현대의 미륵불이다. 고(苦)의 실체를 알게 되면 저런 웃음이 나오는가 보다.

뤄양(洛陽)에서 이틀 묵은 이자(易家) 유스호스텔의 먼지 낀 창밖으로 희뿌연 비가 내린다. 비가 오면 미끄러워 속도를 늦춰야 하고 흙탕물은 튀어서 체인에 엉겨 붙는다. 정저우(鄭州)까지 가려면 130㎞가량 달려야 하는데 과연 빗속에 닿을 수 있을까? 불안한 마음으로 뻑뻑한 페달을 밟는다. 다행히 비옷을 입을 정도는 아니다. 빗물이 몸으로 스며들기 전 바람에 휘발되면서 몸도 가벼워지는 느낌이다.

<27> 라오바이싱(老百姓·서민)의 재발견

동진한 지 얼마 안 돼 백마사(白馬寺)를 지나친다. 중국에서 처음으로 세워진 사원이다. 불교는 백마를 타고 중국으로 왔다. 한 2000년쯤 된 얘기다. 후한 명제의 꿈에서 시작된다. 정수리에 광채가 나는 금인(金人)이 꿈에 나타났다. 서쪽의 부처라는 인물일 거라고 신하가 말하자 불법(佛法)을 구해오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운수가 좋았던지 아니면 부처님의 뜻인지 특파된 이들이 서역으로 가던 도중 백마에 불상과 불경을 싣고 동쪽으로 오던 인도 승려 두 명과 마주친다. 이들을 뤄양으로 모셔와 마련해준 거처가 바로 백마사다. 신하가 부처를 알고 있었던 걸 보면 이미 불교가 전래돼 있다는 걸 뜻하지만 논외로 하자.

정저우(鄭州)로 가는 길에 자전거 수리점이 없어서 들른 자동차정비소. 아저씨가 자동차 바퀴 베어링에 바르는 고체형 기름(속칭 구리스)을 손에 묻혀 체인에 발라줬다.

미륵불을 ‘재물신’으로 만든 실용 종교
화하(華夏)문명의 발상지인 이 일대엔 소림사를 비롯, 외래 문명인 불교 유적이 많다. 중국의 3대 석굴 중 하나인 룽먼(龍門) 석굴도 뤄양 남쪽에 있다. 북류(北流)하는 이수 강변의 동산에 굴감을 파고 10만 점의 석불과 나한 등을 조각한 석굴이다. 불교는 백마사가 지어진 뒤 300년쯤 후 특히 북위(北魏) 시대부터 번성했다. 북위는 선비족이 세운 나라로 위진남북조 시대의 북조에서 150년 남짓 존속했다. 학교 다닐 때 박한제 선생님이 북위를 예로 들어 중국의 역사가 오랑캐와 한족의 호한(胡漢) 체제로 이뤄졌다고 설명하던 기억이 무려 28년 만에 떠올랐다. 공부를 열심히 한 학생이라고 해도 놀라울 일일진대 하물며…. 북위는 뤄양으로 천도하기 전 산시(山西)성 다퉁(大同)에 수도를 뒀고 거기서도 윈강(雲岡) 석굴을 팠다. 중국이 자랑하는 3대 석굴 중 돈황의 막고굴을 제외한 2개의 석굴이 모두 이민족 정권의 작품인 셈이다.

이때부터 불교는 오랜 가뭄에 기다려온 단비처럼 문화적 저항 없이 삽시간에 수용됐다. 기독교가 처음 포교된 지 1600년이 지난 지금에야 퍼지고 있는 것과 대조적이다. 유교라는 문화의 압력으로부터 자유로운 이민족 정권이라는 배경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끝없는 전란으로 삶의 의미를 잃은 중생들에게 불법은 정신적 암흑을 깨는 날카로운 빛줄기와 같은 것이었으리라. 우리가 잘 아는 현장법사를 비롯, 여러 승려들이 불법을 구하러 심지어 사람들의 백골을 길잡이 삼아 광활한 사막과 파미르 고원을 넘었다. 몇 차례 멸불(滅佛) 정책이 나왔지만 교세는 줄지 않았다.

하루 130㎞를 가는 동안 흙탕물과 마른 먼지에 전 내 다리.

룽먼 석굴에서 보는 미륵불과 최근 지어진 절에서 보는 미륵불은 판이하다. 예전의 석불은 명상에 잠긴 듯한 표정에 몸매의 선도 곱다. 허난성 퉁바이(桐栢)현에 있는 허난불교사원을 들렀을 때 입구에는 윗도리를 풀어헤치고 배를 불룩 내밀면서 눈꼬리가 처지도록 웃고 있는, 뚱뚱하다는 표현으로 부족할 정도로 방대한 미륵불이 맞이한다. 원래 불교에서 인생은 고(苦)라고 가르친다. 우리가 괴로운 건 탐욕 때문이고 탐욕은 무명(無明)에서 나온다고 했다. 깨달음을 통해 무명을 깨쳐야 하는데 핵심은 자신이라는 형체의 내부가 텅 비었다는 걸 깨닫는 것이다. 색즉시공(色卽是空)이다.

모든 것은 인연에 따라 만났다 헤어질 뿐이고 삶과 죽음은 끊임없는 인과의 사슬일 뿐이다. 이 윤회에서 벗어나는 길은 ‘무아(無我)’를 깨닫고 자비의 마음으로 수행에 정진해서 열반에 가는 것이다. 그런데 현대 중국의 미륵불은 웃고 있다. 중국의 도교가 현세의 삶을 긍정하는 종교라는 점에서 도교적으로 해석된 미륵불이 아닐까 싶다. 괴로운 자신이 사실 뜬구름만큼 실체가 없는 것이라고 깨달으면 저렇게 순전한 웃음이 나올지도 모른다. 공즉시색(空卽是色)이다.
이 미륵불은 5대10국 시대의 ‘보따리중(布袋和尙·포대화상)’ 계차(契此)의 모습을 본뜬 것이다. 그는 보따리를 메고 다니면서 수많은 기행을 하다 죽었는데 그가 사실은 미륵불이었다는 해석이 나돌면서 현대 미륵불의 모델이 됐다. 이후 또 한 번 중국식 변용이 이뤄지는데 그에게 빌면 재물을 얻을 수 있는 ‘재신(財神)’으로 통한다. 원래 미륵불은 도솔천에 있다가 석가모니불이 입멸한 뒤 56억7000만 년이 되는 때에 다시 사바세계에 출현해 모든 중생을 교화하기로 돼 있는데….

그래도 나 같은 속물에게는 룽먼의 석불보다는 계차의 미륵불이 관대해 보여서 더 좋다. 조금 탐욕을 부려도 다 받아줄 것 같다. 실제 그의 불룩한 배는 세상 모든 것을 포용한다는 뜻이라고 한다. 그는 웃통 벗고 다니는 중국의 남정네를 닮아서 더 친근하다. 초여름부터 정숙한 중국 여자라면 거리에서 시선 둘 데가 마땅치 않을 것이다. 근육질의 식스팩이라면 부정함을 무릅쓸 텐데 처진 가슴에 배만 몇 주름이다. 어떤 이는 셔츠를 입고도 배는 까고 다닌다. 2008년 베이징올림픽을 앞두고 중국 정부는 침 안 뱉기와 함께 상의 착용 캠페인을 벌였지만 미륵불부터 옷을 입히지 못하는 마당에….

중국 정부의 상의 착용 캠페인도 허사
중국에서는 어깨를 드러내놓고 다닌다고 해서 그들을 ‘미스터 어깨’(膀<7237>)라고 부른다. 벗고 지내는 것치고는 속살이 희어서 원시적인 건강미는 느껴지지 않지만 천연덕스러워 보이기는 하다. 무슨 말을 해도 능청 떠는 것 같다. 레슬링 선수처럼 바지는 긴 것을 입었다. 어떻게 보면 친환경적인 패션이다. 옷도 절약하고 무엇보다 빨래를 안 해도 된다. 나도 상의를 벗고 자전거를 탈까 하는 유혹을 느꼈다. 그런데 사람들 얘기가, 한번 벗으면 거추장스러워져서 다시는 상의를 입기 어렵다고 한다. 나는 패드(세칭 뽕)가 달리고 딱 달라붙는 자전거용 쫄바지를 입고 있어서 복장만은 링에 올라가도 될 것이다.

백마사에서 더 동진하다 보면 철로 너머로 수확기를 코앞에 둔 밀밭에 북위의 고성 옛터가 나온다. 밀밭 아래에는 저잣거리가 묻혀 있을 것이다. 효문제 탁발굉도 저기서 집정했을 것이다. 역대 중국 역사상 걸출한 황제로 꼽히는 효문제는 중원을 장악하기 위해 자신의 문화를 버리고 한족의 문화를 받아들인다. 30세 이하의 관원들에게 선비족의 말을 쓰다가 적발되면 처형하겠다고 엄포를 놓을 정도로 동화정책을 폈다. 그리고 한족과 통혼 정책을 써서 선비족은 절멸됐지만 선비족과의 혼혈 정권인 수ㆍ당 제국을 낳는다.

그리고 더 달리니 궁이(功義)시가 나오고 길가에 송나라 4대 황제 인종의 능이 있다. 위진남북조에서 수ㆍ당을 거쳐 숨가쁘게 송대에 다다른 셈이다. 그의 영소릉은 백성을 위해 헌신한 황제라는 평판답게 길에서 내려다보인다. 드라마를 통해 익히 알려진 판관 포청천이 활약하던 시기의 황제다. 인종의 지지가 없었으면 포판관도 없었을 것이다. 마침 연날리기를 하는 사람이 상공으로 연을 띄웠다. 능묘를 배경으로 하늘거리는 연을 보면서 황제도, ‘미스터 어깨’도, 나도, 영겁에 비춰 저 연처럼 잠시 흩날리는 미물이 아닐까 싶다. 그래도 자유로워 보이니 ‘깨달음’은 멀다.

체인이 신음한다. 기름 칠한 지 오래된 데다 흙먼지가 달라붙어서 끼익끽 소리가 난다. 자전거 수리점을 찾았지만 전기자전거와 오토바이 수리점에 밀려나 국도변에는 없었다. 이러다 끊어질지 모른다는 다급함에 자동차 정비소로 들어갔다. ‘U.S. Army’라는 표지를 가슴에 붙이고 미 군복을 입은 곱슬머리 아저씨와 상의 탈의에 트레이닝복 바지 차림의 아저씨, 그러니까 ‘미스터 어깨’가 자전거수리점이 아니라고 손사래를 쳤다. 내가 체인을 가리키며 기름만 칠하면 된다고 말하자 주위를 둘러보는데 당연히 자전거용 기름은 없다. 그들은 자동차 바퀴 베어링에 칠하는 기름덩어리를 보여주며 이것이라도 괜찮으냐고 말했다. 이른바 구리스다. 아쉬운 대로 좋다고 하자 ‘미스터 어깨’가 주저 없이 손가락에 구리스를 묻혀 체인에 바르기 시작했다. 가슴이 찡해 온다. 돈을 내려고 하자 그들은 “무슨 돈이냐”고 씽긋 웃는다.

이번 여행은 ‘미스터 어깨’ 아니 중국 라오바이싱(老百姓·서민)의 발견이라고 해도 좋을 듯하다. 그들의 도움으로 나는 하루하루 무탈히 여행하고 있다. 그들은 오늘 이방인과 옷깃을 스친 인연을 소중히 여겨 작지만 아낌없는 자비를 베풂으로써 윤회의 사슬을 조금 느슨하게 풀었을 것이다. 날도 개고 자전거는 씽씽 달린다. 정저우에 닿았을 때 내 다리는 흙탕물로 한 번 도색한 후 마른 먼지 파우더를 덧칠한 것과 같았다. 형용할 수 없는 빛깔의 더러운 다리. 여기에 상의마저 벗고 달린다면 볼 만했을 것이다.



홍은택 서울대 동양사학과를 졸업하고 동아일보에서 워싱턴 특파원을 지내는 등 14년간 기자생활을 했다. NHN 부사장을 역임했다. 저서로 『아메리카 자전거 여행』 『블루 아메리카를 찾아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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