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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영화] 할리우드 리메이크판 '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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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년 전 일본 도쿄(東京)에서 베스트셀러 공포 소설 '링'의 작가 스즈키 코지(鈴木光司)를 만난 적이 있다. 소설의 끔찍한 내용과 달리 말끔한 인상의 그는 "일본에만 통하는 색깔을 걷어내고 사람이라면 누구나 느끼는 공포의 뿌리를 건드린 게 소설이 성공한 원인 같다"고 자평했다.

그의 말대로 '링'은 국제적 상품으로 떠올랐다. 소설이 히트한 것은 물론 영화 제작이 잇따랐다. 일본에선 1998년 나카다 히데오(中田秀夫) 감독의 작품이 히트했고, 한국에서도 99년 신은경이 주연으로 출연하며 한.일 합작 영화 1호를 기록했다.

이젠 할리우드판 '링'이다. 지난해 10월 고어 버빈스키 감독이 연출한 미국산 '링'은 박스 오피스 1위에 오르며 모두 1억3천만달러(약 1천5백억원)의 흥행 수입을 올렸고, 원산지 일본에 역수출돼 역시 일본 극장가를 점령했다.

억울하게 죽은 원혼의 복수극이라는 동양적 요소를 대중 영화의 흥행 코드로 끌어들이고, 또 이를 군더더기 없는 구성과 오감을 바짝 조이는 화면으로 포장해 할리우드의 기본기를 새삼 확인케 했다.

할리우드판 '링'엔 비판이 쏟아질 수 있다. 분자생물학.유전자공학 등 첨단과학의 상상력으로 중무장한 원작 소설의 미세한 표현을 거세하고 오직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괴기한 영상으로 승부를 건 기획영화로 깎아내릴 수 있다.

하지만 '링'은 공포영화로서의 완성도를 두루 갖추고 있다. 캐릭터의 개연성, 화면의 충격성, 세트의 안정성 등 대중영화의 흥행 ABC를 적절하게 교합한 수완이 도드라진다.

물론 단서는 있다. '링'의 내용을 꿰뚫고 있는 관객이라면 재미가 덜 할 수 있다. 진행 상황이 원작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링'은 짙은 여운을 남긴다. 사람에 따라 반응이 다르겠으나 영화를 보고 나면 비디오 레코더(VCR)에 테이프를 집어넣는 게 잠시 머뭇거려질 정도다.

잘 알려진 대로 '링'은 정체 불명의 비디오 테이프를 본 사람이 이후 1주일 만에 사망한다는 내용을 축으로 한다. 그리고 이 의문사를 파헤치는 여기자(나오미 와츠)가 중심에 선다. 실제로 그녀는 비디오 테이프의 또 다른 희생양이 될 운명에 처한다.

한을 품고 사망한 초능력 소녀(다베이 체이스)의 원혼이 비디오 테이프에 실리고, 또 그 원혼이 살아있는 사람들에게 이유 없는 복수를 펼친다. 자신과 아들(데이비드 도프먼)에게 씌워진 불가항력의 '귀력(鬼力)'에 맞서 생명을 건지려는 여기자의 1주일간 사투가 아슬아슬하고, 특히 막바지 반전이 허를 찌른다.

할리우드판 '링'은 일본판과 크게 두가지가 다르다. 첫째, 영상의 충격도를 강화했다. 수수께끼 같은 미궁의 사건을 헤쳐가며 음산한 분위기 조성에 주력했던 일본판과 달리 할리우드판은 눈과 귀를 놀라게 하는 장면을 자주 삽입했다.

예컨대 TV 브라운관에서 파리가 튀어나오거나, 전화 수화기에서 피가 흘러나온다. 일본판보다 볼거리를 강화한 것이다. 또 여기자의 아들이 그린 불길한 그림을 매개로 사건의 단서를 찾아가는 과정도 새롭다.

둘째, 가족애의 부각이다. 일본판은 초능력자를 따돌리는 사회적 요소를 내세운 반면 할리우드판은 아들을 지키려는 모성애를 강조했다.

원작의 디스토피아적 전망을 개인적 차원으로 끌어내린 게 다소 불만스럽지만 상업적 흡입력을 증폭시킨 건 부정하기 어려울 듯하다. 취향에 따라 호.불호가 갈라지겠지만 말이다. 10일 개봉. 15세 이상 관람가

박정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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