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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책연구과제 성공률 98%라니… 부끄러운 수치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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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2호 22면

지난해 11월 국제과학비즈니스벨트 기초과학연구원장을 맡은 뒤 처음 노벨 과학상 발표를 접한 오세정(59·사진) 박사의 표정엔 허전한 기색이 엿보였다. 노벨상 시즌을 맞아 인터뷰에 응한 그는 “언제까지 다른 나라 수상자 해설만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우리나라 과학자의 첫 수상 소식을 놓고 흥겨운 인터뷰를 해야 하는데…”라며 털털 웃었다. 국제과학비즈니스벨트는 과학입국을 통해 선진국 진입을 앞당기자는 MB정부의 대규모 국책 사업이다. 이 가운데 대전 대덕연구단지에 본원을 둔 기초과학연구원(IBS)은 ‘한국인 노벨 과학상 탄생’이라는 국민적 여망을 업고 출범한 중추적 국제연구기관이다. 차세대 연구리더를 선정해 연 100억원 안팎의 연구비를 집중 지원한다.

오세정 기초과학연구원장 인터뷰

인터뷰가 이뤄진 11일엔 마침 세계 최고 수준의 공과대학 미 칼텍(Caltech·캘리포니아공대)과 광주과학기술대(GIST)의 총장들이 참석한 가운데 교수·학생 교류 및 상호협력에 관한 양해각서를 교환하는 행사가 있었다. 오 원장은 광주광역시에서 열린 행사에 참석한 뒤 KTX 편으로 서둘러 귀경해 오후 8시에나 만날 수 있었다. 그는 “칼텍이 이런 협약을 맺은 곳이 세계적으로 네 군데밖에 안 된다. 우리 과학기술의 수준도 만만찮게 높아져 조만간 노벨상을 기대해도 될 것 같다”고 말했다.

일본과 수평 비교는 무리
-10일로 생리의학·물리학·화학 세 가지 노벨 과학상 발표가 완료됐다. 올해 수상자들을 본 소감은.
“노벨상은 크게 새로운 것의 발견, 인류사회 기여라는 두 가지 관점에서 점수를 매긴다. 또 한 가지 특징적인 면이 있다. 노벨상은 보통 30, 40대 젊은 나이에 연구한 것에 대해 꽤 세월이 지난 60대 이후에 주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이번에 수상한 줄기세포 연구는 2006년에 이룩한 일로 불과 6년 만에 상을 받게 됐다. 우리처럼 과학기술의 전통이 짧은 후발국의 경우 비교적 최근의 업적을 가지고 노벨상을 바라볼 수 있다는 점에서 고무적이다.”

-올해도 일본인 수상자가 나왔다. 이로써 일본은 1949년 이후 지금까지 일본 출신의 노벨 과학상을 16명이나 배출했다. 21세기 들어서만 9명이다. 한·일 경제 격차는 꽤 줄었다고 하는데 우리는 왜 노벨 과학상 수상자가 탄생하지 못하나.
“노벨상에 근접한 사람은 꽤 있다. 다양한 분야에서 인재의 저변도 두터워졌다. 다만 A급은 꽤 많은데 최고 수준인 S급 층이 얇다고 본다. 우리나라의 기초과학연구원에 해당하는 일본 연구기관으로 이화학연구소(리켄)라는 곳이 있다. 거의 100년 전인 1917년에 설립됐다. 이미 그 무렵 노벨상에 근접한 사람이 꽤 있었을 정도다. 1960년 들어 비로소 과학기술 진흥에 뛰어든 우리나라와 수평 비교하는 건 무리다.”

-일본 과학자가 줄기세포로 노벨상을 탔다. 일반인들이 보기에 우리나라도 꽤 앞선 분야 같은데.
“우리도 줄기세포 쪽에선 세계 10위권 안에 든다고 평가받는다. 하지만 노벨상을 따질 정도가 되면 선진국과의 격차가 크다. 이번에 생리의학상을 받은 역분화 줄기세포 같은 경우 SCI(Science Citation Index)의 국제 학술논문 인정 건수가 우리나라의 경우 2001년부터 10년간 19편에 불과한데 일본은 110편으로 6배 이상이다. 같은 기간 성체 줄기세포 SCI 논문도 우리나라는 1178건, 1위인 미국은 1만818편으로 9배 차이가 난다.”

-생리의학상을 받은 존 거던 케임브리지대 교수나 야마나카 신야 교토대 iPS 연구소장의 오뚝이 인생이 화제다. 우리나라 과학기술계도 실패와 미숙을 용인해 성공 스토리를 만들 환경이 시급한 것 같다.
“우리나라 정부가 지원하는 연구 과제의 성공률이 98%에 달한다는 건 역으로 부끄러운 이야기다. 성공할 만한 연구만 골라서 한다는 것이다. 정부 돈 받고 연구에 실패하면 연구비를 물어내든지 다음 프로젝트 참여 기회를 제한받는다. 다들 실패를 꺼리고 고만고만한 연구에 눈을 돌리게 된다. 미 스탠퍼드대학 교수 출신의 노벨상 수상자로 지금은 독일 막스플랑크연구소장으로 있는 헨슈(Hansch) 박사가 있다. 이런 이야기를 하더라. 박사과정 학생들이 연구 과제를 정하면 우선 전문가들의 의견을 물어오라고 시킨다는 것이다. ‘그거 좋은 아이디어’라고 하면 관두게 하고 ‘도저히 불가능한 연구’라고 고개를 저으면 오히려 연구를 시킨다. 어려운 걸 해야 가치 있는 것이 나오고, 실패한다 해도 고민하고 고생하는 과정에서 많은 걸 배울 수 있다는 뜻이다. 사람이 어떻게 하늘을 날 수 있느냐는 냉소 속에서 비행기는 발명됐다.”

-기초과학에 비해 응용과학 비중이 너무 높은 점, 단기 실적 위주의 정량적 과학기술 평가가 노벨상 탄생을 지연시킨다는 지적이 많다.
“선진국 정부의 과학기술 투자 예산은 기초와 응용이 5대 5 정도 균형을 이룬다. 우리는 2대 8이었다가 MB정부 들어 간신히 3대 7 정도 됐다. ‘바보 과학자가 세상을 바꾼다’는 칼럼을 중앙일보(2008년 6월 18일자)에 기고한 적이 있다. 김수환 추기경이 스스로를 바보라고 하지 않았나. 일본 이야기 자꾸 하게 되는데 영악스럽지 못하고 우직하게 일하는 과학자가 일본에는 많다. 중성미자 연구로 2002년 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고시바 마사토시는 도쿄대 물리학과를 꼴찌로 졸업해 30년 동안 한 우물만 팠다. 우리나라 과학기술 연구는 이에 비해 유행에 많이 휩쓸리는 편이다. 또 논문 건수를 중시하다 보니 굵직한 연구 한두 가지를 오래 하기보다 자잘한 일을 많이 벌이는 풍토가 생긴다. ”

바보 과학자가 세상을 바꾼다
-기초과학연구원에 대한 기대가 크다.
“일본 고도 성장기에 ‘경제 동물’이란 비아냥을 국제적으로 들었다. 서구가 근세 수세기 동안 일군 첨단 과학기술 자산을 활용해 돈 버는 데 급급했지 인류의 순수과학 지적자산을 늘리는 데는 상대적으로 소홀했다는 질책이 담겨 있다. 이제 우리도 그런 고민을 할 때가 됐다. 순수과학은 공학 등 과학·산업기술의 기초이기도 하지만 인문학·예술처럼 인류의 문화적 활동이기도 하다. 기초과학을 소홀히 하면서 문화민족을 이야기할 수 없다. 우리나라는 애플의 아이폰을 기막히게 잘 쫓아갔지만 이제 우리가 아이폰 같은 새로운 기기를 세계 최초로 만들어 내야 한다. 그런 점에서 기초과학연구원의 임무가 막중하다.”

-언제쯤 한국인 노벨상이 나올 것 같나.
“미국 유학 후 귀국한 1985년 ‘노벨상에 도전한다’는 주제의 TV 특집프로그램에 출연한 적이 있다. 당시 국책연구비 규모나 연구 인프라 측면에서 ‘현재로선 도저히 안 되는 일’이라고 단정한 기억이 난다. 하지만 이제 우리도 여러 분야에서 상당한 수준에 올라 있다. 10년 안에 노벨상 수상자가 나올 것이라 믿는다. 한 번 봇물이 터지면 일본처럼 수상자가 잇따를 수 있다. 물이 보글보글 비등점에 이르기 전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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