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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인 320병, 탁 트인 한강 전망 사람들 부르는 ‘아파트 와인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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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면

이원복 교수가 장미살롱에서 손님들을 위해 와인을 따르고 있다.

“여기 온 게 3개월 정도 됐을까요.” “전 봄에 다녀가고 처음이네요.” 오랜 만에 만난 고명애·이봉기 대표가 지난 봄과 여름을 떠올리며 말했다. “벌써 그렇게나 됐어요? 제가 비밀번호 알려드릴 테니 언제든 와서 이용하세요. 늘 비어있는데요 뭐. 하하.” 이원복 교수의 말에 너도나도 비밀번호를 메모해 놓겠다고 나서며 웃음을 터뜨렸다. 장미살롱의 가을 장사가 시작됐다.

송파구 잠실 장미아파트 14층. 지난 7일 오후 7시, 잠실 장미아파트. 엘리베이터를 타고 14층에 도착하니 ‘소년’의 얼굴을 한 신사가 손님들을 맞이했다. 교양 만화 『먼 나라 이웃나라』의 저자이자 덕성여대 산업미술과의 이원복(65) 석좌교수다. 이 교수는 현재 아들과 부인이 캐나다에서 지내고 있는 탓에 서울에서 혼자 생활하고 있다. 이날 그의 집에 초대 받은 이는 필기구 회사 파버 카스텔의 이봉기(63) 대표와 독일 가전 기업 밀레 코리아의 안규문(62) 대표, 섬유회사를 운영하고 있는 고명애(51) 대표, 세 사람이다. 이 교수가 바로 어제까지 가족들이 있는 캐나다에서 지내고 온 터, 이들이 올 가을 첫 손님인 셈이다.

 이들이 친분을 쌓게 된 것은 3년여 전부터다. 지인을 통해 알게 돼 업무적으로 도움을 주고 받기도 하고 때론 가벼운 농담도 주고 받는 친구 같은 사이로 지내고 있다.

 현관을 지나 거실에 들어서자 일렬로 놓인 4대의 와인셀러가 눈에 띈다. 빈틈 없이 빼곡하게 채워진 와인셀러는 1개 당 80병이 들어간다. 전체 320병은 족히 넘는 양이다. 종류도 산지도 다양하다. 베스트셀러 저자이자 와인 애호가인 이 교수가 소장하고 있는 와인은 얼마나 대단한 것들일까. “좋고 비싼 와인을 보관하려는 게 아니라 상하지 않게 하려고 설치한 것”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대부분 3만~5만원대의 마시기 편한 와인들이란다.

 와인 셀러 바로 옆으로 안락한 ‘ㄱ’자 원목 소파가 눈에 들어온다. 소파 뒤로는 올림픽대로가 굽이쳐 흐르고 노랗고 빨간 불빛이 물에 반사돼 더없이 근사한 야경을 만들어 내고 있다. 소문으로만 듣던 ‘장미살롱’이다.

베란다 개조해 만든 와인바, 편안한 느낌

장미아파트에 있는 와인바라고 해서 이름 붙여진 ‘장미살롱’은 정확하게는 13.32㎡(4평) 남짓한 서재이자 식탁이다. 오디오에서는 클래식 음악이 흘러 나오는 사이, 원목 테이블에는 레드 컬러 러너가 반듯하게 펼쳐져 있고 그 위에 작은 초 3개와 와인 글라스가 손님을 기다리고 있다. 모두 자리에 앉자 조명이 스르르 톤다운 됐다. 고 대표가 “와, 호텔스카이 라운지가 따로 없는데요.” 장미살롱에 처음 왔다는 안 대표는 “독일식 구조로 된 공간이라 실용적이고 편안한 느낌”이라고 말했다.

 “본래 여기는 세탁기를 놓고 빨래를 너는 공간이었어요. 88년 입주할 때 개조해 전혀 다른 분위기로 바꿨죠. 광진교·천호대교·올림픽대교·잠실철교·잠실대교·청담대교·영동대교·성수대교·동호대교…, 한강 다리 아홉 개가 한 눈에 보이는 전망을 빨래로 가릴 수는 없잖아요.”

 1970년대에 지어진 이 아파트에서 이 교수는 24년째 살고 있다. 게으른 탓에 이사를 가지 못한다고 하지만, 이 풍광을 두고 다른 곳에 갈 수 있을까 싶다. “이사 갈 때 되지 않았냐고 자주 물어보곤 하는데, 전 죽어서 여길 나갈 생각입니다. 장미살롱이 제게 가져다 준 것이 너무 많죠. 『먼 나라 이웃나라』도 여기서 썼고, 또 이렇게 와인을 기울이며 친구도 만들어주고 있잖아요.”

이탈리아 와인의 화려한 향 즐기며 대화

이날 글라스를 채운 첫번째 와인은 이탈리아산 ‘삐에로판 루베르판’. 드라이하면서도 과일 향이 살짝 감도는 맛으로, 술자리의 문을 여는 데 잘 어울린다. 두 번째는 ‘비나 마이포’. “지난 해 가을, 한 와인 회사와 함께 제 이름을 따 출시했던 와인입니다. 이게 우리집에 있는 마지막 병이에요. 다들 잘 음미해보세요.” 이 교수가 직접 그린 만화 캐릭터가 라벨 한쪽에 붙어 있다. 분위기가 무르익었을 때 마시는, 가장 맛있는 와인으로 이 교수가 ‘돈나푸가타 앙겔리’를 제안했다. “이탈리아 와인은 향이 아주 화려해요. 맛도 맛이지만 잔을 천천히 돌려서 향을 충분히 즐겨보세요.”

 이어서 선보인 와인은 여러 과일 맛이 복합된 ‘알바로 팔라시오스 페탈로스’. 고 대표의 반응이 좋다. “너무 달지도 않고 드라이한 게 아주 좋네요.”

 시계바늘이 오후 10시를 넘기자, 프랑스산 화이트 와인인 ‘앙리 부르주아 상세르 레 바론’을 마시며 가을 한가운데의 와인 파티가 마무리 됐다. 미술학과 교수와 독일 기업 대표들과 섬유업에 종사하는 여성 CEO의 만남인 만큼 화제거리도 다양하다. 와인 얘기는 물론 영화·세계사·독일의 라이프 스타일·일본 남성들의 성향 등 이야기거리가 끝이 없다.

장미살롱에 초대된 고명애 대표·이봉기 대표·안규문 대표, 그리고 호스트 이원복 교수(왼쪽부터).

보고 싶은 것을 볼 수 있는 자리, 모두가 명당

장미살롱에는 어떤 사람이 올까. 교수의 집이라고 해서 귀한 손님에 한해 초대되는 게 아닐까 싶지만 실제로 ‘누구든’ 올 수 있다. 편하게 들러 와인 한잔하고 풍경을 눈에 담으면 그 뿐이다. “사치스럽지 않고 편안하게 와인을 즐길 수 있는 공간이죠. 무엇보다 제일 좋은 점은 ‘무료’라는 거구요. 하하.”

 안 대표가 “장미살롱에서 가장 좋은 자리가 어디냐”고 묻자 이 교수는 “올림픽대로의 불빛과 뻥 뚫린 한강을 정면과 측면으로 모두 볼 수 있는 소파의 앞쪽 자리가 명당”이라고 말했다. 그러자 고 대표가 웃으며 고개를 갸웃한다. “각자 보고 싶은 것을 볼 수 있는 자리가 명당이죠. 보고 싶은 사람도 보고 싶은 풍경도 보고…” 고 대표의 말에 이 교수가 “그 말이 정답”이라며 크게 웃어 보였다.

글=하현정 기자
사진=장진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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