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연구중심대학은 선택 아닌 필수 … 사업 성과 최종 이익은 국민에게 돌아가게”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06면

‘의료계 제3의 물결’, ‘선진국형 병원 모델’ ‘황금알을 낳는 거위’…. 연구중심병원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다. 하지만 목소리만 높인다고 저절로 이뤄지지는 않는다. 연구공간 확보·인력 재배치·재정투입 등 관련 인프라를 구축해야 갈 수 있는 길이다. 중앙일보헬스미디어는 연구중심병원이 뿌리를 내릴 수 있게 텃밭을 일구고, 정부 정책이 나아갈 방향을 논의하는 자리를 마련했다. 지난달 28일 서울 중구 프레이저 플레이스 컨퍼런스룸에서 주요 대학병원 연구책임자를 초청해 좌담회를 가졌다. 이 자리에는 김동규 서울대병원 신경외과 교수, 선경 고려대 안암병원 흉부외과 교수, 정용안 가톨릭대 인천성모병원 핵의학과 교수, 최은경 서울아산병원 방사선종양학과 교수, 한설희 건국대병원 신경과 교수(가나다 순)가 참석해 국내 대학병원의 연구경쟁력을 진단하고 미래를 조망했다.

선경·최은경·김동규·한설희·정용안(왼쪽부터) 교수가 지난달 28일 서울 중구 프레이저 플레이스에서 좌담회를 갖고 국내 대학병원의 연구경쟁력 강화 방안과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논의했다. [사진=김수정 기자]

▶선경 교수 : 현재 국내 병원의 경영 구조는 낮은 진료수가에 따른 박리다매 형태다. 여기에 규모의 대형화, 장비 집중화에 올인 했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하지만 인구 감소로 점차 의료시장 파이가 작아지고 있다. 의료기관은 현재의 경영 구조로 살아남기 힘들다. 결국 파이를 키워야 한다. 진료수익 의존형에서 탈피해 재무구조를 다각화하는 방법을 고려해야 할 때다. 해외환자 유치, 해외 시장 진출 등이 대안이다. 특히 시선을 연구중심병원으로 돌려야 한다. 국가의 거시경제 측면에서 볼 때 연구중심병원은 포스트 IT 시대에 의료산업화의 첫발을 내딛는 사업이다. 미시경제 측면에선 병원 경영의 재무구조를 다각화하기 위한 패러다임의 변화를 꾀할 수 있다. 연구중심병원은 곧 국가 연구개발 투자의 효율성을 높이는 모델이다. 국내 의료기관이 당면한 현실을 볼 때 연구중심병원으로의 전환은 시의적절한 사업이다.

 ▶최은경 교수 : 연구중심병원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꼭 가야 할 길이다. 그렇지 않으면 병원의 미래가 없다. 외국은 이미 연구중심병원을 표방하며 가시적인 성과를 내고 있다. 세계 최고 의료기관 중 하나인 미국의 MD앤더슨은 병원 수익의 25%를 연구활동을 통해 개발한 치료제와 의료기기에서 올린다. 우리나라 의료기관도 더 이상 연구를 등한시할 수 없는 시점에 왔다. 이 같은 세계적 흐름을 감지하고 많은 국내 의료기관들이 수년 전부터 연구중심병원으로 발돋움하기 위해 준비하고 있다. 의료산업의 활성화는 병원이 주도할 수밖에 없다. 병원에는 환자들의 임상자료, 우수한 두뇌를 가진 의료진, 연구 인프라 등 풍부한 자원이 모두 있다.

 ▶한설희 교수 : 지난 20년 동안 우리나라를 먹여 살린 IT산업의 발전은 우수 인력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지난 20년간 최우수 인력이 모인 곳이 의대다. 우수 인력을 진료에만 묶어 놓으면 안 된다. 연구중심병원에 재배치할 때다. 우수한 인력과 인프라가 탄탄한 대형병원이 연구중심병원으로 가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독식하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 작은 병원에도 우수한 인력이 있다. 중소병원들도 특화할 수 있는 전문분야가 있다. 단기간에 성과를 내긴 힘들어도 한 계단씩 오르면 연구중심병원으로 성공할 수 있다. 우리(건국대병원)는 노인성질환 연구에 집중할 계획이다.

▶김동규 교수 : 의료의 역할은 크게 진료·사회봉사·연구 세 가지다. 이중 앞의 두 가지는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이제 연구중심병원에 관심을 가질 때다. 우리나라도 연구중심병원을 위한 토양이 다져졌다. 의료기관이 자생적으로 갖춘 부분도 있고, 정부도 점차 지원을 늘리고 있다. 대형병원들이 연구중심병원 롤 모델을 역할을 하며 연구 역량을 갖춘 병원들을 이끌어야 한다. 하지만 연구중심병원으로 성공하려면 기존 시스템으론 역부족이다. 새로운 틀을 짜야 한다. 연구공간을 확보하고, 병원을 찾는 환자들의 인체자원을 잘 활용해야 한다. 그래서 서울대병원은 인체자원은행을 준비하고 있다.

▶정용안 교수 : 인천성모병원도 4년 전부터 병원운영의 다각화를 위해 연구중심병원 로드맵을 그리고 있다. 특히 경쟁력 있는 분야로 의료기기를 선택했다. 이를 위해 미국의 보스턴에서 시작된 의료기기와 관련된 산·학·연 연구네트워크인 시밋(CIMIT·Center for Integration of Medicine and Innovative Technology)을 벤치마킹했다. 이 네트워크의 목적은 대학·병원·연구소에서 새롭게 찾아낸 의료기기 관련 주제를 기업과 연결시켜 신속하게 상용화하는 것이다. 인천성모병원이 나아가고자 하는 모델이다.

 ▶선 : 우리나라 의료기관은 연구중심병원으로 성공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0.1%의 우수한 인재(의사), 첨단 의료장비, 방대한 환자 데이터를 갖췄다. 하지만 문제는 이런 역량을 진료에만 쏟고 있다는 점이다. 상대적으로 연구 역량을 강화할 기회가 부족했다. 정부의 연구중심병원 사업은 진료에만 몰두하던 병원의 구조를 연구로 바꾸는 환경을 만들도록 유도해야 한다. 특히 정부의 정책은 병원 간의 단순 경쟁 구도를 만드는 정책을 지양해야 한다. 일정한 수준을 갖춘 병원을 폭넓게 연구중심병원으로 지정해 지원해야 한다. IT산업에서 휴대폰 사업 하나가 시장을 먹여살리는 것처럼 한두 곳 병원에만 집중하는 건 의료산업에 대한 이해가 떨어지는 것이다. 또 연구중심병원에 선정되지 않은 병원이 의료기관으로서 자격이 없는 것도 아니다. 연구중심병원은 병원을 발전시키려는 다양한 전략 중 하나다. 역량과 조건이 맞으면 진입하는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다른 부분에서 경쟁력을 발휘하면 된다. 정부는 이번에 연구중심병원에 선정되지 못한 병원은 다음에 진입할 수 있는 기회를 주거나 다른 지원책을 마련해야 한다.

 ▶정 : 연구중심병원에 선정되면 병원의 가치가 올라가는 건 당연한 결과다. 현재 국내 의료기관의 흐름은 서울의 대형병원이 주도하고 있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지방병원들도 연구중심병원을 위해 투자와 노력을 아끼지 않고 있다. 연구중심병원 선정에 지방병원이 배제되지 않아야 한다.

 ▶최 : 병원들마다 각각 특화시킬 수 있는 연구분야가 있다. 신약·의료기기·줄기세포 등 다양하다. 예를 들어 많은 의료기관에서 사용하고 있는 의료장비인 감마나이프는 스웨덴의 신경외과 의사가, 사이버나이프는 스탠퍼드대학에서 개발한 것이다. 이처럼 병원에서 아이디어를 내 산업화하고 진료 이외 분야에서 경쟁력을 갖는 게 연구중심병원이 해야 할 일이다. 이를 위해선 병원 경영과 의사들의 마인드가 바뀌어야 한다. 병원에 있는 우수한 인력을 연구에 활용하기 위해 업무 비중을 진료 50%, 연구 30%, 교육 20%처럼 명문화하는 것도 방법이다.

  ▶한 : 연구중심병원 사업이 뿌리를 내리려면 환자의 인식 개선도 필요하다. 예를 들어 신약을 개발하려면 환자를 대상으로 유효성과 안전성을 검증해야 한다. 하지만 이런 신약 연구에 대한 환자의 이해가 부족하고, 의식이 변하지 않으면 절대 성공할 수 없다. 병원만 연구중심병원으로 가기 위한 준비를 마쳤다고 끝나는 게 아니다.

 ▶김 : 연구중심병원 사업의 필요성에 대해선 모두 공감한다. 정부도 연구중심병원 선정 기준안을 발표했다. 하지만 연구중심병원에 선정되면 좋은 병원이고, 탈락하면 뒤떨어지는 병원이라는 이분법적인 시각은 버려야 한다. 각 병원의 여건과 역량에 맞게 선택하는 게 중요하다. 또 정부는 연구중심병원 사업을 이끌어 가려면 연구비 지원 활성화에 대해 심도 있는 고민을 해야 한다. 병원은 그동안 연구에 대한 투자가 부족했다. 병원에 투입하는 재정은 국민 세금이기 때문에 공공성 등을 엄격히 따져야 한다. 아울러 “연구중심병원 간판만 주고, 병원이 알아서 해라”라고 하는 식이면 안 된다. 엄밀히 따지면 정부는 국민을 대표한 투자자이고, 여기에 대한 책임져야 한다. 

 ▶정 : 의료기관이 연구를 활성화하려면 투자비의 확보가 필수다. 병원의 수입은 은행 이자에도 못 미친다. 병원 진료수익 마진율을 최소 5%는 보장해줘야 한다. 그러면 병원의 역량을 연구에 집중할 수 있다.

 ▶선 : 연구중심병원에 선정되더라도 병원끼리 경쟁할 게 아니라 컨소시엄으로 가야 한다. 병원이 똘똘 뭉쳐서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정부에 요청하는 방식이 바람직하다. 예를 들어 A병원이 암을 발견하는 영상장비에 집중하면 B병원은 진단기기, C병원은 치료기기, D병원 항암제를 개발하는 형식이다.

 ▶한 : 보건복지부의 연구중심병원 관련 공고와 담당자가 자주 바뀐다. 전문성이 결여된 것처럼 보인다. 연구중심병원 선정을 앞두고 있는 시점에서 정책의 일관성을 유지하는 게 중요하다. 연구중심병원 선정 기준은 병원 규모가 크든 작든 똑같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연구중심병원에 선정되지 못한 병원은 국민 시각에서 볼 때 중급병원으로 비칠 것이다. 모든 병원이 연구중심병원으로 갈 필요는 없다고 말한 정부 관계자의 말과는 차이가 있다. 정부는 연구중심병원에 선정되지 못한 병원들도 본연의 기능에 충실할 수 있도록 지원해야 한다.

 ▶최 : 연구중심병원 사업에 대한 논의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연구중심병원의 최종 목적이다. 사회적 기여와 국민을 위한 공공성 강화에 있다는데 모두 동의할 것이다. 만성골수성백혈병치료제인 글리벡을 개발한 하버드대 교수에게 왜 그렇게 열심히 연구에 몰두하느냐고 물었다. 그는 신약을 빨리 만들면 그 이익이 환자에게 돌아가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연구중심병원이 나아가야 할 길에 대한 답이라고 생각한다.

 ▶선 : 맞다. 연구중심병원 사업의 최종 이익은 환자와 국민에게 돌아가야 한다. 병원이 최종 수혜자가 되면 환자는 마루타가 될 뿐이다. 의료는 기본적으로 공공재다. 또 의료가 가진 두 가지 속성은 복지와 보건이다. 과거 의료는 복지의 도구로만 사용됐다. 최근 보건이 강조되며 산업화라는 국가 명제가 나온 것이다. 병원은 연구를 통해 복지와 보건의 선순환 구조를 이끌어야 한다. 이것이 연구중심병원의 취지다. 연구 결과의 산업화로 수익을 창출하면 의료의 공공성 분야에 재투자할 수 있다.

  ▶한 : 우리나라가 초고령화 사회로 넘어가는 시간은 세계에서 가장 짧다. 노인인구가 증가하며 의료비가 급격히 늘 것이다. 연구중심병원 사업이 성공적으로 정착해 신약·신의료기술 등이 개발되면 국가적으로 천문학적인 의료비를 줄일 수 있다. 또 해외로 수출하면 국부를 창출할 수 있다. 연구중심병원 사업은 국가·환자·병원·의료인이 모두 윈-윈 할 수 있는 발판이 될 것이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