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물과목 가장 싫어했어요…그런데 ‘나방 여사’ 됐네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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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운홍씨(60)가 자신이 직접 기른 나방들로 만든 표본 상자를 보여주고 있다. [최모란 기자]

꼬박 10년이 넘도록 전국의 산야를 돌며 채집한 애벌레 468종을 키우며 나방으로 성장하는 과정을 글과 사진으로 기록한 나방 도감이 나왔다. 그동안 국내에서 출판된 나방 관련 서적이 없지는 않지만 애벌레에서 성충까지의 모든 과정을 사진으로 담은 본격 도감으론 국내 최초다. 놀라운 것은 이 지난한 작업을 해낸 사람이 평범한 전업주부란 사실이다. 학명과 정확한 분류체계는 물론 먹이식물·유충시기·우화(羽化, 날개돋이) 시기 등 서식에 관련된 사항을 기록했기 때문에 학술 도감으로서도 손색이 없다.

 최근 출간된 『나방 애벌레 도감』(자연과생태刊)의 저자 허운홍(60)씨는 생물학과는 아무런 인연이 없다. 학창시절 가장 싫어하던 과목이 생물이었고 대학시절엔 역사를 전공했다. 처음 애벌레를 키우는 방법에 대해 몇몇 전문가의 도움을 받긴 했지만, 도감을 만든 건 허씨 혼자서 해낸 것이나 다름없다. 애벌레를 채집한 뒤 외국의 문헌과 대조하며 정확한 분류 계통을 확인하고, 애벌레가 고치를 거쳐 나방으로 탈바꿈하는 과정을 직접 촬영하는 등의 전 과정이 그랬다.

 철학 교수인 남편과 함께 사는 아파트의 8.2㎡ 넓이 작은 방과 다용도실이 허씨의 작업실이자 연구실이었다. 두꺼운 커튼으로 햇빛을 가린 방에는 곤충 표본상자 100여 개와 먹잇감인 각종 나뭇잎을 담은 플라스틱 밀폐용기가 빼곡했다.

 허씨가 나방에 빠져든 건 10여 년 전 서울 강동구의 길동자연생태공원에서 자원봉사자로 일하면서부터다. 허씨는 “생태교육자로 활동하면서 아이들과 함께 곤충을 채집하고 공부하다 보니 재미를 느끼게 됐다”고 말했다. 곤충에 흥미를 느낀 허씨는 처음에는 잎벌·노린재·딱정벌레 등을 길렀다. 어느 날 잎벌 애벌레 상자에서 갓 변태(變態)한 나방을 발견했다. 비슷한 생김새 때문에 나방 애벌레를 벌 애벌레로 착각했던 것이다. 부화한 나방의 이름과 습성을 공부하면서 허씨는 나방에 푹 빠졌다.

 그때부터 허씨는 강원도 설악산, 경주 함불산 등 전국을 돌며 나방 애벌레를 채집하고 일본에서 전문 서적을 구입해 연구했다. 하지만 애벌레를 키우기란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먹이가 끊이지 않도록 하기 위해 궂은 날씨에도 깊은 산속을 헤매며 나뭇잎을 찾았다. 가족들이 “제발 한 대 장만하자”며 조를 때에도 거들떠보지 않던 에어컨을 애벌레 키우는 방에 설치했다. 그런 과정에서 허씨는 ‘인섹트 맘’(곤충 엄마란 뜻)이란 별명을 얻었다.

 “애벌레가 성충이 되려면 2개월에서 10개월 정도 걸려요. 중간에 죽는 아이들도 있지요. 제가 가장 애착을 갖는 나방이 점무늬큰창나방인데 무려 5년 만에 부화에 성공했어요.”

 허씨는 “생물학이 기피학문이 되면서 우리나라에선 아직까지 제대로 된 나방 연구가 거의 이뤄지지 않은 것으로 안다”며 “앞으로 80세까지 나방 2000여 종을 관찰하는 게 목표”라고 했다. 허씨의 도감을 꼼꼼히 살펴 본 배양섭 인천대 교수(생명과학)는 “곤충학자들도 못한 일을 평범한 주부가 해낸 건 대단히 존경스러운 일”이라고 말했다.

최모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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