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정진홍의 소프트파워

거름 지고 장에 간다더니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0면

정진홍
논설위원

# 예전엔 시골장터마다 돌아가며 5일장이 섰다. 장이 서면 사람들은 하다못해 텃밭에서 가꾼 채소나 뒷산에서 캔 나물이라도 이고지고 장터로 갔다. 저마다 이것저것 추슬러 장에 갈 채비를 할라치면 빈둥거리던 한량조차 장 구경이라도 할 요량으로 따라나서기 마련이다. 하나 그냥 가기 뭣하니 빈 가방 들고 학교 가듯 빈 지게에 거름이라도 지고 장에 가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속담에 ‘거름 지고 장에 간다’는 말이 생겨났던 것 같다.

 # 닷새 만에 돌아오는 5일장이 이러할진대 5년에 한 번 있는 대선장(大選場)이 서는데 가만있을 턱이 없다. 빈 지게에 거름이라도 지고 빈 바구니에 지푸라기라도 얹어 장에 가는 이들이 실로 적잖다. 그렇게라도 허세 떨며 왔다갔다해야 면이 서고, 혹 재수 좋으면 놀음판에서 개평이라도 얻어 쓸 수 있기 때문일 게다. 그래서인지 작금의 대선장은 빈 바구니를 머리에 인 이른바 ‘폴리페서들’과 빈 지게에 거름만 잔뜩 진 ‘노털 정치꾼들’로 붐비다 못해 요란하다. 정작 대처(大處)의 큰 장에서 뭔 일이 있는지 그 여파가 어떨지는 관심도 없다. 북쪽의 평양장에서는 뭔 일이 있는지 알지도 못하고 알려고도 안 한다. 올해 농사작황이 어떤지, 다가오는 겨울을 어찌 날 건지는 까맣게 잊은 채 그저 대선장에서 누가 상권을 거머쥐느냐만 관심인 게다.

 # 이번 대선장엔 세 곳에서 이미 크게 천막을 치고 좌판을 열었다. 박씨네, 안씨네, 문씨네가 그것이다. 대선장에 온 사람들은 이 세 가게를 기웃거리기 마련이다. 박씨네 가게는 그 아버지 대에 인근 상권을 모두 거머쥐었던 대선장터의 터줏대감 격이다. 파란곡절 많았던 아버지의 가업을 잇겠다고 시집도 가지 않은 큰딸 박씨가 팔 걷어붙이고 나섰는데 요즘엔 아버지가 채 갚지 않았던 빚이 여기저기서 튀어나와 처음엔 내가 진 빚도 아니고 채무관계도 불분명하다고 버티다가 시장 민심이 등돌리는 것을 뒤늦게 절감하고 그 빚 갚겠다며 민심 돌리느라 여념이 없다.

 # 안씨네 가게는 새로 문을 열었다. 가게 문을 여니 안 여니 말도 많았는데 애초부터 열 마음이었으면서 괜히 바람 잡은 느낌이 짙다. 다른 가게처럼 중간마진 거의 남기지 않고 정직하게 장사하며 유통기한 지난 것들은 아예 취급도 하지 않겠다 했는데 막상 열고 보니 이것저것 상한 것들이 적잖고 중간 마진을 요모조모 남겨 먹은 것도 드러나 장터 민심이 엇갈리고 있다.

 # 문씨네 가게가 선 곳은 본래 노씨네 가게터였다. 노씨가 죽고 난 후 한동안 닫았던 가게를 다시 열면서 노씨의 옛 동업자이자 친구였던 문씨가 자의 반 타의 반 연 가게다. 처음엔 문씨 자신이 그닥 장사의지가 없어 흐물텅해 보였지만 요즘엔 제법 장사도 잘한다는 얘기가 들린다. 하지만 대선장에서 끝까지 살아남으려면 어떻게든 안씨네 가게와 합치지 않으면 터줏대감 박씨네 가게에 밀려 또다시 문을 닫아야 할지 모를 처지다.

 # 이런 대선장의 요즘 화젯거리는 가게마다 지배인을 누구로 내세우느냐는 것이다. 본래 지배인이란 주인이 가진 약점과 한계를 보완하면서 능란하게 가게를 꾸려갈 인물이 제격이다. 하지만 정작 이번 대선장에서는 그만한 인물도 보이지 않거니와 몇몇이 이 가게 저 가게 옮겨 다니며 훈수 두는 시늉을 하는 수준이다.

 # 특히 안씨네 가게 문을 여는데 이러쿵저러쿵 말을 담그며 어른 행세를 하던 이 중 한 사람은 박씨네 가게에서 ‘행복장부’를 뒤적이며 안씨는 결국 가게 문도 열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가 머쓱해졌다. 또 다른 이는 당신 같은 사람이 족히 300명은 있다는 안씨 얘기에 골이 나 있다가 지금은 문씨네 가게에서 ‘화합장부’를 뒤적이게 되었는데 정작 문씨네 가게에 지분 있는 이들이 왜 하필 그 사람이냐며 한마디씩 하는 통에 머쓱하긴 매한가지가 됐다. 그런가하면 안씨네 가게는 ‘재벌저격수’란 별칭을 지닌 이를 내세웠는데 같은 가게 안에 ‘관치, 모피아, 신자유주의’의 삼박자를 갖춘 이가 먼저 자리한 통에 정작 어찌될지는 좀 더 지켜봐야 할 듯싶다. 어찌되었건 대선장 장바닥은 갈수록 질펀해지고 있다.

정진홍 논설위원

▶ [정진홍의 소프트파워] 더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