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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 ‘더티 해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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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2면

김종윤
뉴미디어 에디터

지난달 21일 주요 인터넷 포털사이트엔 ‘서산 피자가게 사장’ 안모(37)씨의 사진이 올랐다. 이 피자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던 여대생 이모(23)씨의 자살 뉴스가 나온 직후다. 이씨는 ‘사장이 나를 성폭행했다’고 폭로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숨진 이씨의 휴대전화 메모장에서는 ‘내가 당한 일을 인터넷에 띄워 알려 달라’는 글이 발견됐다. 온라인은 들끓었다. 누리꾼들은 즉각 안씨의 개인 홈페이지를 찾아내 그의 사진을 공개했다. 목숨까지 던진 여학생의 절규를 생각하면 이 정도는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문제는 다음부터였다. 안씨의 어머니와 아내, 자식의 사진도 순식간에 포털사이트를 장식했다. 포털에서는 안씨의 개인 홈페이지 접속을 차단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지금도 블로그 등에서는 안씨 가족의 사진을 쉽게 볼 수 있다. 안씨가 죗값을 치르는 건 당연하다. 하지만 누리꾼들로부터 천형과 같은 ‘사이버 응징’을 당한 가족들은 무슨 죄란 말인가.

 사이버 공간에 ‘시민 보복’의 과욕이 넘친다. 마치 미국의 범죄영화 주인공인 ‘더티 해리’가 온라인에 부활한 것 같다. 해리 캘러한(클린트 이스트우드 분) 형사는 죄를 짓고 요리조리 피해가는 악당을 그냥 두지 않는다. 법에 따른 처벌은 안중에도 없다. 그는 학생들이 탄 스쿨버스를 납치한 범인을 쫓아가 매그넘44 권총을 겨누고 이렇게 말한다. “이건 지상 최강의 권총이야. 네 놈 머리통 따윈 깨끗이 날려버릴 수 있어.”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식의 처단이다. 그 총구에서 불을 뿜자 관객들은 통쾌해한다. 하지만 거기까지다. 이건 왜곡된 정의다. 현실에서는 있을 수 없고, 있어서도 안 된다.

 그런데 사이버 스페이스에는 이런 뒤틀린 응징의 욕구가 넘친다. 각종 범죄 때마다 횡행하는 ‘신상 털기’가 자칭 ‘정의의 사도’들에 의해 자행된다. 이런 짓은 또 다른 인권 유린의 출발점이다.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산부인과 우유주사(프로포폴) 사망 사건의 피해자 이름과 사진이 공개돼 가족들의 가슴에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냈다. 고려대 의대생 성추행 사건 때는 무관한 학생이 피의자로 오인돼 실명과 개인 홈페이지 주소가 온라인에 퍼졌다. 잘못된 정보를 올린 누리꾼 7명은 명예훼손 혐의로 입건되기도 했다.

 온라인은 늘 시끌벅적하다. 다양한 의견이 넘친다. 여기에서도 절제의 미덕은 지켜져야 한다. 헌법재판소의 인터넷 실명제 위헌 판결로 악성 글을 막을 제동장치도 없어졌다. 남은 건 누리꾼들의 자정 노력밖에는 없다. 이런 기대는 점점 엷어지고 있다. 더티 해리는 악당을 처단한 뒤 경찰 배지를 호수에 던진다. 그의 얼굴에는 더러워서 경찰 못하겠다는 냉소가 넘쳐났다. 이런 냉소는 더 큰 폭력을 부를 뿐이다. 사이버 공간에서 파렴치범을 처단하겠다고 신상을 터는 건 또 다른 괴물을 키우는 범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