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양선희의 시시각각

‘힐링’은 장삿속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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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2면

양선희
논설위원

‘힐링’ 그리고 ‘복고’. 요즘 우리 젊은이들이 푹 빠져 있다는 트렌드다. 마음의 아픔을 치유하고 위로받으려는 인구는 주로 2030세대이고, 청춘을 회고하는 복고 열풍의 회고연도는 1990년대로 주 소비층은 30대란다. 이렇게 아프고, 노쇠하고, 회고에 매달린 젊은이들이 넘치는 나라. 이런 나라의 미래는 어떤 모습인지 그려지지 않는다. 너무 절망적이어서. 어쩌다 2012년 대한민국 젊은이의 자화상은 이런 모습일까. 도대체 우리 젊은이들은 왜 그렇게 아픈가. 정말 아픈 게 맞긴 맞나.

 그들의 아픔에 대한 진단은 대략 이렇다. 각박한 스펙 쌓기 경쟁에 지치고, 경제성장은 꺾이고, 청년실업과 비정규직이 넘쳐 원하는 직장에 들어갈 기회도 적고, 희망이 없어서 아프단다. 한편에선 젊은이들에게 ‘그러니 너희는 아프다’고 진단하고, 또 한편에선 이럴 때는 서로 보듬어 안아주고 위로하는 힐링이 필요하다며 힐링 상품 소비를 부추긴다.

 그래서 요즘 ‘힐링 산업’은 승승장구다. 숲과 자연을 낀 ‘힐링 여행’ 상품이 나오고, 건강식품은 ‘힐링 푸드’라는 이름으로 팔린다. 힐링 강좌, 힐링 스포츠, 힐링 댄스 등 온갖 힐링 상품들이 판치면서 19만원짜리 ‘힐링 스파’, 500만원짜리 3박4일 힐링 리조트 여행도 나왔다. 힐링을 내건 브랜드 출원이 줄을 잇고, 힐링을 앞세운 책들도 100여 종이 넘게 책방에 나왔다.

 TV에서도 힐링을 내세운 프로그램이 인기를 끌고, 그러다 보니 최근 대선철에 젊은 표가 아쉬운 대선 주자들은 ‘힐링 캠프’라는 TV 프로그램에 나가 눈도장부터 찍는다. 또 “국민의 고통과 아픔을 치유하는 힐링 대통령이 되겠다”는 둥 대선 주자마저 동정 어린 ‘따뜻한’ 표정으로 대책 없는 힐링 이미지를 팔아먹는다.

 힐링은 장삿속으로 변질되고 있다. 아니, 어쩌면 힐링은 애당초 위로와 치유를 앞세워 젊은이들에게 병들었다고 최면을 거는 상술에 지나지 않았던 것인지도 모른다. 아니라고, 정말 이 사회가 부조리해서 아프다고 항변할 수도 있다. 그럼 언제 세상살이가 부조리하지 않았던 때가 있었던가. 영문도 모르고 동족 간에 죽고 죽였던 6·25, 경제개발의 미명 아래 억압당했던 유신시대, 대명천지에 군대가 탱크를 밀고 쳐들어갔던 5·18 광주민주화운동 같은 극단적 부조리가 판치던 시대에도 살았다.

 물론 90년대, 화려했었다. 홀연히 민주화가 이루어졌고, 95년 1인당 국민소득 1만 달러 시대를 열었을 때 곧 선진국이 된다며 환호했다. 97년 외환위기 전, 날마다 불야성을 이룬 거리에선 화려한 밤 생활이 펼쳐졌다. 그때에 비하면 요즘이 좀 우울한 건 맞다. 글로벌 금융위기로 경제가 불투명하고, 양극화로 인한 박탈감이 심해졌다. 그래도 우리 사회는 여전히 풍요롭고, 정부는 늘 복지를 늘릴 궁리를 한다.

 그런데 젊은이들은 아프다고 징징거리고, 기성세대는 불쌍하다고 전전긍긍하면서 과잉보호에 여념이 없다. “엄살부리지 말라”고 따끔하게 꾸짖는 어른도 없다. 6·25로 부모·형제를 잃고, 5·18 민주화운동으로 친구를 잃은 세대, 진짜 상처투성이였던 그 세대도 아프다고 징징거리며 위로를 구하는 데 기운을 빼지 않았다. 외환위기 당시 구조조정의 칼바람 속에서도 젊은이들은 어느 때보다도 활발하게 벤처를 창업했고, 국민들은 금을 모았다. 진짜 위기의 그 순간엔 모두 살아보겠다고 다시 일어섰을 뿐이다. 상처는 남에게 내보이며 하소연하는 게 아니라 자신이 견디고 극복해야 낫는 것이다.

 풍요로웠던 90년대가 그립지 않으냐고? 기억나지도 않는다. 살기 바빠서. 바쁘지 않으니 그립고, 치열하지 않으니 아픈 거다. 미래가 불투명하지 않았던 때는 없었다. 미래를 어떤 방향으로 끌고 갈는지는 그 시대를 사는 사람들의 투지가 결정하는 것이다. 힐링과 청춘 회고는 젊은이들이 해야 할 일이 아니다. 장삿속에 휘둘려 낭비할 시간이 어디 있나. 젊음이 얼마나 아까운 것인데. 무엇보다 치유해 준답시고 젊은이들을 나약하게 주저앉히려는 장삿속은 제발 이 땅에서 사라져 주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