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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김한의 그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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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파란색엔 불안한 매력이 있다. 차갑지만 냉정하지 않다. 꿈과 모험의 색깔이면서 성숙과 치유의 색이다. 파란색은 근원으로 되돌아가려는 욕구다. 영원을 향한 갈망이다. 생명을 낳고 기르는 물빛이다.

원로화가 김한(74)의 그림들은 온통 푸른빛이다. 바다는 짙고 배는 연하고 사람은 푸르스름하다. 물고기와 나비, 치렁치렁한 여인의 머리칼에까지 그는 파란 빛을 섞었다.

바쁜 마음 잠시 내려놓고 크고 작은 그의 60여 점 작품을 하나씩 들여다보노라면 전시실은 어느 한순간 바닷 속 같다. 순도 높은 원천과 신화의 세계다. 10년 전 이중섭미술상을 받은 김한이 도시인에게 주는 선물이다.

그는 설화의 화가다. 읽는 그림을 그린다. 피카소가 단순한 형태화 '게르니카'에서 그러했듯이 김한도 어릴 적 고향 어촌으로 숱한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다.

연푸른 색조의 건장한 두 남녀가 어깨동무하듯 손을 휘저으며 주위의 따뜻한 배경 색들에서 경쾌하게 걸어나온다. 2001년 작품 '만추일기'는 에덴 동산에서 쫓겨나는 아담과 이브를 연상시킬 만큼 서사적이다. 낙원을 이탈하는 인간의 두려움과 연인을 사랑하는 설렘이 함께 느껴진다. 무심한 수탉은 문명을 여는 상징일까.

'포구(浦口) 설화'와 '포구송'은 그가 평생 향수에 젖어 그린 함경북도 명천의 가장 한국적인 풍경들이지만 그리스 신화의 주인공이라 해도 좋을 인체의 비례적 아름다움이 표현돼 있다. 서구인의 감수성이다.

김한의 푸른 갈망엔 망향의 인생 이야기가 풀어져 있다. 의사가 되길 강권하는 아버지와 불화해 가출했다. 한국전쟁 때 단신 월남, 뒤에 내려온 가족들과 4년 만에 상봉했다. 인민군에 입대했던 동생 김철(71)만 북한에 남아 시를 쓴다.

남한의 화가와 북한의 시인은 2000년 평양에서 50년 만에 만나 목 놓아 울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형은 '가고파'를 노래한다. 동생은 '어머니'라는 시로 북한 최고의 시인이 됐다.

김한의 푸른 그림은 보는 이들에게 성숙과 치유, 정서적 해방감을 안겨준다. 시원한 안식이다. 인류의 근원성에 근접한 미학의 성취다. 이런 보편의 성취가 북녘 고향과 가족 이산이라는 아픈 한국성에서 일궈진 것이기에 더 값지다. *31일까지 밀알미술관 초대전(02-3412-0061~2)

전영기 정치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