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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상맞네요 이 간첩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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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영화 ‘간첩’에서 22년차 간첩 김 과장(김명민)이 가짜 비아그라를 팔아 번 돈의 냄새를 맡으며 흡족해하고 있다. 그는 북한에서 망명한 고위관리의 암살보다 그의 금고를 터는 데 힘을 쏟는다. [사진 롯데 엔터테인먼트]

동료들과 접선은 스마트폰 문자메시지로, 북(北)과의 교신은 PC방에서 e-메일로 간단히.

 영화 ‘간첩’(우민호 감독·20일 개봉)에 그려진 요즘 남파간첩들의 모습이다. 이불 뒤집어쓰고 단파 라디오와 난수표로 북의 지령을 받던 예전 간첩들과 비교하면 엄청난 변화다. 겉모습만 바뀐 게 아니다. 영화 속 간첩들은 체포 위협이나 북의 명령보다 남쪽의 ‘생활고’를 더 무서워한다.

 스크린 안의 간첩이 달라졌다. 시대가 변한 까닭이다. 1960~70년대 반공영화에서 피도 눈물도 없는 테러리스트로 묘사됐던 그들이 90년대 말 이후 인간적 고뇌를 느끼는 ‘사람’으로 그려지더니 이제는 전세난·사교육비 등 남쪽 현실에 고통받는 ‘생활인’으로 등장했다.

 ◆궁상맞은 스파이

‘간첩’은 전세난, 한미 FTA, 독거노인, 싱글맘 등 우리의 고된 오늘을 간첩의 시선으로 바라본다. 남파된 지 수십 년이 흘러 정체성조차 가물가물한 그들에게 남한의 힘겨운 현실은 그들의 고통으로 되돌아온다. 우민호 감독은 “표면적으론 간첩영화지만,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고 싶었다”고 했다.

 남파 22년차 간첩 김 과장(김명민)은 가짜 비아그라를 팔며 생활하는 가장이다. 총을 묻어둔 산에 아파트가 들어서는 바람에 총도 잃어버렸다. 망명한 북한 고위관리를 암살하라는 지령이 떨어지지만 그의 관심은 전세금 인상분 3000만원을 어떻게 마련하는가에 쏠려있다.

 완수해야 할 미션이 달갑지 않은 건 홀로 시각장애 아들을 키우는 부동산 아줌마 강 대리(염정아), 소를 키우며 FTA 반대시위에 나서는 우 대리(정겨운), 부인과 사별하고 홀로 사는 윤 고문(변희봉)도 마찬가지다. “애 봐야지, 돈 벌어야지, 이번 한 번만 빼주라”(강 대리) “소는 누가 키울겨! 소 굶어 죽일겨?”(우 대리) 등 간첩들의 생활고 앞에 “본분을 잊지 말라”는 북한 최고의 암살자인 최 부장(유해진)의 위협은 공허한 메아리일 뿐이다.

 ◆간첩으로 보는 시대사

‘간첩 신고는 113’이라는 푯말이 한집 건너 붙어있던 반공시대에 간첩은 주로 테러범으로 등장했다. 그런 고정관념이 깨진 건 90년대 후반 대북 화해 분위기가 조성되면서부터다. 간첩을 인간적으로 표현하려는 영화적 시도가 이어졌다.

 예컨대 ‘쉬리’(1999)는 간첩을 로맨스의 대상으로 끌어올린 첫 영화다. 북의 테러 지령과 대북 첩보요원 중원(한석규)에 대한 사랑 사이에서 고민하는 여간첩 명현(김윤진)은 암살자의 이면에 숨겨진 여성 이미지를 부각시켰다.

 같은 해 개봉한 ‘간첩 리철진’은 간첩을 코미디의 대상으로 삼았다. 리철진(유오성)은 슈퍼돼지 유전자 샘플을 훔치러 남파되지만 4인조 택시강도단에 공작금을 몽땅 털린다. 허술하다 못해 순진한 간첩의 모습에서 웃음이 터지지만, 고뇌 끝에 자살하는 장면에서는 슬픔이 느껴진다.

 또 ‘이중간첩’(2003)은 두 남녀 간첩의 비극적 사랑이라는 구도 속에 남과 북에서 모두 버림받는 ‘경계인’의 고뇌를 표현했다. ‘의형제’(2010)의 남파공작원 지원(강동원)은 남북 화해무드 때문에 쓸모 없어진 간첩으로, 북의 가족을 그리워하는 캐릭터다.

 영화 ‘간첩’의 대사 두 토막. “인터넷만 치면 다 나오는데 무슨…” (김 과장), “박통(박정희 대통령) 때가 좋았지”(윤 고문)는 몸만 쓰는 간첩이 더 이상 위협적이지 않은 시대 상황을 보여준다. 해킹 한 번에 펜타곤(미 국방부) 정보망까지 뚫리는 세상에 정보수집 요원으로서 간첩의 가치가 줄어들었다는 것일까. 간첩을 코미디 소재로 비틀 만큼 우리 사회의 역량이 커졌다는 의미도 있다.

 하지만 영화는 영화, 현실은 현실이다. 영화평론가 강유정씨는 “영화의 주 관객인 젊은층이 전쟁을 체험하지 않았기 때문에 간첩을 소재로 한 멜로드라마나 코미디 영화가 계속 나오는 것 같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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