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취재일기

말뚝과 게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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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7면

김기환
사회부문 기자

우편물은 때로 ‘테러’의 수단이 되기도 한다. 지난 17일 오전 서울중앙지검에 도착한 말뚝이 그랬다. 이 말뚝엔 ‘다케시마(독도)는 일본땅’이란 문구가 새겨져 있었다. 보낸 사람은 스즈키 노부유키(鈴木信行·47). 지난 6월 서울 종로 일본대사관 맞은편 ‘위안부 소녀상’에 다케시마 말뚝을 놓은 일본의 극우주의자다. 위안부 할머니들로부터 모욕·명예훼손 혐의로 고소를 당한 그에게 검찰이 소환을 통보하자 항의 표시로 또 한 번 ‘말뚝 테러’를 한 것이다. [중앙일보 9월 17일자 19면]

 스즈키는 최근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와 동북아역사재단 사무실 앞에 말뚝을 설치하는 등 테러 수위를 높이고 있다. 또 테러에 사용한 말뚝을 자신의 블로그에서 기념품으로 판매해 논란을 일으켰다.

 검찰은 말뚝을 받길 거부했다. 아니, 뜯어보지도 않고 반송했다. 검찰 관계자는 “극우주의자의 행동에 반응을 보이는 것 자체가 적절치 않다고 판단해 그대로 돌려보냈다”며 “감정적 대응을 최대한 자제하고 일본 사법당국과 공조해 차근차근 사법처리 절차를 밟을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반응은 엉뚱한 데서 터져 나왔다. 이날 오후 서울 광화문우체국에선 한 시민단체가 아키히토(明仁·79) 일왕과 노다 요시히코(野田佳彦·55) 일본 총리 관저에 게다(일본 나막신) 한 짝씩을 보냈다. ‘후안무치한 일본은 독일을 본받으라’는 문구도 적었다. 스즈키가 소환을 거부하고 검찰에 말뚝을 보낸 데 대한 항의 표시였다. 이 단체 관계자는 “곧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에서 반일 시위를 열겠다”고 말했다.

 ‘말뚝’과 ‘게다’ 소동을 보고 있자니 이웃나라 중국과 일본에서 벌어지고 있는 영토 분쟁이 떠올랐다. 센카쿠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를 두고 벌어진 양국 간 외교 분쟁은 최근 반일·반중 시위로 번지고 있다. 중국에선 일제차를 부수고 일본기업 공장에 불을 지르는 등 테러 수위가 높아지고 있다. 일본에선 최근 후쿠오카 주재 중국 총영사관을 상대로 연막탄 공격까지 일어났다. 이성보다 감정이 앞서 벌어진 테러다.

 이런 테러가 한국에서 일어나지 않으리란 법은 없다. 급진주의자는 어디에나 있고, 스즈키도 그중 한 명이다. 여기에 민간이 앞장서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식으로 대응해선 안 된다. 정부가 나서 외교로 풀고, 검찰·경찰이 나서 불법 행위에 대해선 엄벌해야 한다. 일본 사법당국도 아무리 자국 편을 드는 행위라 해도 테러에 대해선 범죄인 인도 청구 등 절차에 협조해야 한다. ‘차분하지만 단호하게 대응한다’는 원칙이 우선이다. ‘말뚝’에 ‘게다’로 대응하는 건 하수(下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