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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취재일기

100억원어치 수해물자가 보잘것없다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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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7면

이영종
정치국제부문 차장

“보잘것없는 얼마간의 물자를 내들고 우리를 심히 모독했다.” 북한이 12일 밤 조선적십자회 대변인을 내세워 우리 정부의 수해 지원 제안을 비난한 말이다. 이날 낮 판문점을 통해 대북 지원 협의 중단을 통보한 데 이어 화풀이를 늘어놓은 것이다. 북한이 ‘보잘것없다’고 한 물품은 밀가루 1만t, 라면 300만 개, 의약품 등 100억원어치다. 밀가루만 25t 대형 트럭으로 400대 분량이고 라면도 50~60대에 실어야 할 적잖은 물량이다.

 하지만 북한 당국은 이를 돌연 걷어찼다. 정부가 지난 3일 지원을 제안하자 북한은 10일 “남측이 계획하고 있는 수량과 품목을 알려 달라”며 호응했다. 일주일간의 검토 끝에 내린 결정이었음에 틀림없다. 그렇지만 남측이 11일 건넨 지원 리스트를 본 북한은 하루 만에 “그런 지원은 필요 없다”며 협상의 문을 닫아버렸다.

 북한의 돌변으로 가장 큰 고통을 받을 사람은 역시 수해 피해를 당한 북녘동포들이다. 그들에게 가장 필요한 먹을 것과 의약품을 전달하려던 정부 당국과 대한적십자사는 당혹해 하고 있다.

 북한 적십자 대변인은 “피해지역 주민들의 생활 안착과 피해복구에 실질적 도움이 될 물자라면 고려해 볼 수 있다는 입장이었다”고 주장했다. 우리가 주려던 물품이 별 도움이 안 되는 생색내기용이라 걷어찼다는 뜻일까. 통일부 당국자는 “일단 긴급구호용 식량과 의약품을 보낸 뒤 북한이 요구하는 물품을 추가로 협의해 보내주려 했다”고 설명했다.

 결국 북한은 쌀과 시멘트에 대한 집착 때문에 수재민 긴급구호를 팽개쳤다고밖에 볼 수 없다. 북한의 대남 전략가들은 민생 챙기기보다 남한 당국을 곤경에 빠뜨리는 쪽을 택한 것이다. 지난해 수해 때 “쌀과 시멘트를 통크게 달라”고 버티다 수해지원을 결국 무산시킨 힘겨루기의 재방송이나 마찬가지다.

 하지만 ‘인민’이 빠진 통일전선전술은 ‘꼼수’에 불과하다. 지방에선 태풍·수해 사망·실종자가 500명에 이르는 참극이 빚어졌는데도 ‘평양공화국’에서는 연일 공연·축제가 이어지고 체제 우상화물과 유원지가 속속 건설 중이다. 거기에 동원된 자재·장비와 인력만 수해복구 현장에 투입해도 굳이 외부에 손을 벌릴 필요가 없을 정도라고 한다.

 북한 적십자회는 “큰물(홍수) 피해와 관련해 그 어떤 것도 기대한 것이 없지만 이번에 더욱 환멸을 느꼈다”며 지원의 손길을 내민 우리 측을 되레 비난했다. 그런데 ‘환멸을 느꼈다’는 표현은 북한의 변화를 기대했던 우리 국민이 쓰고 싶은 말이 아닌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