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밀한 ‘북방 실크로드’ 전략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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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러시아의 우호를 상징하는 우수리스크의 ‘중국경제무역합작구’에 세워진 조각상.

지난 8~9일 열린 블라디보스토크 아시아·태평양 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를 계기로 한반도 북방에 대한 관심이 부쩍 커지고 있다. 중국의 경제력 확장과 러시아의 동진(東進) 정책이 마주쳐 정치·경제 지형도가 급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의 동북 진흥과 러시아의 동진 정책이 맞닿는 곳이 바로 ‘중국 동북 3성과 극동·시베리아 지역’이다. 중앙일보와 POSRI(포스코경영연구소)가 경제개발의 열기로 뜨거운 현장을 찾았다.

시베리아 레나강 중류의 인구 20여 만 도시 야쿠츠크. 동부 시베리아의 중심에 위치한 석유·가스 허브다. 이곳이 동북 3성-시베리아 철도-레나강-북극해로 이어지는 ‘물류 신루트’의 거점 도시로 급부상하고 있다.

북위 62도상 동토(冬土)의 땅인 이곳이 요즘 뜻밖에도 중국 사람들로 넘친다. 최근 현지를 다녀온 한 국내 대기업 관계자는 “거리엔 한자 간판을 단 중국 가게, 중국 노래방, 중국 식당이 즐비했다”며 “심지어 한국 식당도 중국인이 운영하고 있었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상권의 20~30%는 중국인 소유”란 설명이다.

 러시아 전체에는 현재 600만 명의 중국인이 활동하고 있고, 이 중 시베리아·극동에만 100만 명이 살고 있다는 추산까지 나온다. 극동·시베리아의 전체 인구가 600만 명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중국인 파도’다.


러시아 우수리스크의 ‘중국경제무역합작구’에 있는 의 류 생산 공장에서 근무하는 중국 근로자들. 약 1400여 명의 중국 근로자들이 일하고 있다. [우수리스크=김형수 기자]

 중국의 시베리아 진출 전략은 치밀하다. 2009년 두 나라 사이에 체결된 ‘2009~2018년, 극동·시베리아와 동북 3성의 연계 발전 계획’을 보면 중국의 의도가 뚜렷이 담겨 있다. ‘계획’에 따라 추진되는 4대 물류 클러스터 중 가장 서쪽 ‘자바이칼-만저우리 클러스터’의 경우 중국은 석유공업 도시인 다칭(大慶)과 러시아를 연결하는 철도 4개, 도로 3개를 신설할 계획이다. 이에 비해 러시아가 하는 일은 기존 철도와 도로를 개량·보수하는 정도다. 시베리아의 자원을 빨아들이는 한편 유럽을 향해 물건을 실어나르는 물류망을 확보하려는 중국의 강력한 의지를 읽어볼 수 있다.

 ‘블라고베센스크-헤이허’와 ‘니즈니 레닌스코에-툰장’ 클러스터는 다리만 들어서면 동북 3성 경제의 북방 출구가 된다. 다리가 얼마나 중요한지는 최근의 ‘아무르 부교 사태’가 보여준다. 20012년 4월 6일, 아무르주 블라고베센스크와 헤이룽장성 헤이허시 사이엔 사상 처음으로 부교가 개통됐지만 안전 문제로 12일 만에 폐쇄됐다. 그런데 그 짧은 사이, 6억5000만 루블(260억원)에 이르는 화물차 수천 대 분량의 물동량이 부교를 건너 러시아로 쏟아져 들어갔다. 제조업이 없는 시베리아는 품질에 상관없이 중국 제품을 흡수하기에 바쁘다. 싸기도 하지만 가격 대비 품질로 중국 제품만 한 것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 다리로 강을 건너고 아무르주를 지나면 바로 북극해를 끼고 있는 사하공화국이다. 거기서 북부 간선과 레나강을 운하로 북상하면 북극해의 중간 해역으로 나온다. 이렇게 완성되는 것이 바로 ‘시베리아 남북 종단 루트’다. 멀리 북쪽의 베링해엽까지 올라가북극해로 향할 필요가 없어진다. 그렇게 되면 시베리아를 넘어 멀리 유럽까지 향하는 중국 제품이 시베리아 북부 회랑으로 쏟아져 들어갈 수 있다. 중국의 시베리아 ‘장악’에 가속도가 붙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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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밖에 니즈니 레닌스코에-툰장 철교가 2014년 완공을 목표로 건설 중이다. 한국교통연구원은 이 다리가 현재의 수송 거리를 50% 단축할 것으로 분석한다. 이 다리도 시베리아·밤(BAM) 철도와 연결돼 시베리아를 종단하면서 북극항로와 연결되는 길을 열게 된다. 중국은 지난 8월 쇄빙선 설룡호로 첫 북극해 항해에 나서게 할 만큼 물류 이동 경로의 단축에 힘을 쏟고 있다.

 극동 클러스터는 연해주와 하바롭스크주를 노린다. 블라디보스토크-훈춘-장춘(長春)을 잇는 고속도로, 훈춘-크라스키노·자루비노를 연결하는 도로, 수이펀허-포그라니츠느이를 잇는 도로 등이 들어설 예정이다. 국경의 통관 지점들도 대폭 현대화하는 계획이 세워져 있다. 특히 블라디보스토크-수이펀허는 극동 교역액의 40%가 통과될 만큼 중요한 길목이다.

 ‘중국과의 깊은 관계’에 대한 러시아 내부의 태도는 미묘하다. 러시아 연방 정부는 공식적으론 ‘중국 참여 없이 시베리아를 개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입장이다. 시베리아·극동 개발의 책임자인 빅토르 이샤에프 연방 극동 개발부 장관은 “극동 개발에서 중국의 역할은 절대적이다. 싫든 좋든 그게 현실”이라고 말했다. 푸틴 대통령도 APEC 폐막 뒤 러시아 기자들과의 만나 “중국은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나라”라고 했다.

 그러나 아시아 사회과학원 산하 극동지부의 빅토르 라린 박사는 “시베리아의 중국인은 대부분 지식 수준이 낮고 생활의 질도 떨어지기 때문에 많이 받아들여선 곤란하다는 경계론이 일고 있다”고 말했다. 이렇게 경계하는 측은 중·러 경제협력 계획이 제대로 성사되기 힘들 것이라고 내다본다. 러시아가 희망하는 자동차 같은 첨단 제조업 분야는 중국이 투자할 생각을 별로 하지 않고 있는 것도 문제다. 중국이 자원에만 눈독을 들이고 있는 게 아니냐는 경계론이 러시아 쪽에서 일고 있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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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특별취재팀= 안성규 CIS순회특파원, 한우덕 중국연구소장, 심상형 POSRI 수석연구원, 김형수 사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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