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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인들의 꿈과 열정, 프로는 프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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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6면

이원규
시인

이 가을의 초입에 당대의 예술가들과 어울리며 대취(大醉)하는 기쁨을 누렸다. 모처럼 맛보는 가슴 벅찬 여행은 그대로 한 편의 로드 무비였다. 그것도 내가 잘 알지 못하는 사진과 영상의 장인들이었기에 더욱 그러했다. 저마다 자기만의 꿈을 ‘바로 지금 이 자리’에 현실화하는 사진작가들의 열정을 엿보며 진정한 예술가의 초상이 무엇인지 또 한 수 배웠다.

 모터사이클을 타고 먼저 찾아간 곳은 부산의 송정해수욕장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사진가 김홍희의 작업실이었다. 영화계의 이단아가 김기덕 감독이라면 사진계의 이단아는 김홍희가 아닌가. 소위 국내의 그 화려한 스펙도 없이 그는 ‘안 보이는 한쪽의 눈’으로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해왔다. 그는 사진가인 동시에 문장가다. 그의 책 『나는 사진이다』를 읽으며 나는 그가 얼마나 자신을 혹독하게 단련시켜 왔는지 알 수 있었다.

 그와는 아직 못다 이룬 약속이 하나 있다. 모터사이클을 타고 우리나라의 모든 비포장 길을 함께 달리며 기록하자는 것이다. 이 약속은 3년째 보류 중이지만 이미 그 약속만으로도 온몸이 달뜨고 달뜨니 아직 가보지 않고도 마음만은 다 가본 셈이다. 그날 밤 김홍희의 라이더 친구들과 곧바로 의기투합해 광란의 밤을 보낼 수 있었던 것도 다 이 때문이다.

 부산에서 울산 남구도서관으로, 그리고 다시 경기도 용인의 ‘꿈꾸는 작은도서관’으로 달려가 강연을 마치고 서울의 세종문화회관까지 내달렸다. 나의 모터사이클 ‘흑마’는 가쁜 숨을 몰아 쉬며 한반도의 가을을 앞당기고 있었다. 내가 도착해야 할 그곳이 목적의 전부가 아니라 그곳으로 향하는 과정의 길들이, 그 풍경들이, 그 서늘한 바람들이 내 몸 깊숙이 문신처럼 새겨졌다.

 지금 세종문화회관 미술관에서는 ‘장인의 꿈과 열정, 갤럭시 3 카메라로 바라보다’ 기획전(9월 17일까지)이 열리고 있다. 이 전시가 눈길을 끄는 것은 5명의 사진작가들이 우리 시대 각 분야의 장인 10명을 오로지 핸드폰으로 찍었다는 사실 때문이다. 사실 지금도 낯 뜨거운 일이지만 어쩌다 보니 나도 모델들 중 하나가 되어 ‘진공묘유(眞空妙有)’라는 거창한 주제로 내 얼굴 사진 수십 장이 전시돼 있다.

 시인과 모델은 그 얼마나 불균형의 극치인가. 그래도 내게는 참으로 소중한 경험이었다. 내가 찍힌다는 사실보다 나를 찍는 사진작가의 열정을 오랫동안 엿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신구대 교수인 권태균 작가와는 오랜 인연이 있었기에 2000장 이상의 사진을 찍히는 일이 덜 고통스러웠다. 같은 장면을 열 번이고 백 번이고 반복해서 찍어대는 그 집중력이 실로 놀라웠다. 그리고 ‘카메라가 좋아야 더 좋은 사진을 찍을 수 있다’는 상식이 일거에 무너지는 쾌감도 맛보았다. 무림고수에게는 나무젓가락도 무서운 창칼이 아닌가. 문제는 여전히 장비가 아니라 철학이요 장인정신이었다.

 내 얼굴 사진을 외면하고 서둘러 도망치듯 바이크를 타고 지리산 화개동천으로 돌아와 ‘왕의 남자’로 유명한 이준익 감독을 만났다. ‘시인의 정원’이라는 아름다운 펜션에서 열린 1박2일의 지리산학교에 명예강사로 온 것이다. 새 영화를 준비하며 와신상담 중인 그 또한 우리 시대의 이단아가 아닌가. 그를 통해 진정한 예술가는 결국 이단아 혹은 경계인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절감했다. 가을비가 오는 바람에 바이크 매니어인 그가 모터사이클을 타고 오지 않아 조금은 아쉬웠지만 참으로 유쾌한 만남이었다. 다음에는 반드시 모터사이클을 타고 오겠다는 그와 헤어지자마자 베니스에서 낭보가 들려왔다. 김기덕 감독의 ‘피에타’가 황금사자상을 받았다는 것이다. 지리산에서 몇 번 만나고 나도 그의 소박한 홍천 작업실에 방문한 적이 있으며, 그의 영화 ‘빈집’의 소재 제공자였던 인연만으로도 남의 일 같지 않게 너무나 기쁘고 고마웠다.

 이 가을에 사진과 영상의 장인들에게서 신선한 충격을 받으며 내 인생의 큰 손님인 시에게 너무 소홀했다는 것을 반성하지 않을 수 없었다. 프로는 역시 가장 아마추어적인 열정으로 무장할 때 프로다.

이원규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