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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의식 없는 이 세상이 바로 카타콤 아닌가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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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죄의식은 인간다움의 동의라고 말하는 소설가 이승우. “오늘의 우리는 자신의 이유가 분명하고 너무 잘나서 타인에 대한 인정과 배려가 없다. 죄의식을 느낄 겨를이 없다”고 말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기독교적 세계관에 따르면 인간은 원죄의 존재다. 세상의 덫에서 벗어나려는 억센 몸짓도 원죄를 진 자의 피할 수 없는 운명이다.

 현실 속 구원문제를 천착해온 소설가 이승우(53)의 새 장편 『지상의 노래』(민음사)의 등장인물도 마찬가지다. 배경은 해발 890m에 자리한 천산수도원. 그곳에 남겨진 벽서(壁書)의 비밀이 소설을 풀어가는 매개가 된다. ‘신 앞에 던져진 인간을 탐구하는 작가’라는 평처럼 이번 소설에도 기독교적 원죄의식이 근저에 흐른다. 같은 어구를 반복하며 인간의 내면을 드러내는, ‘강철 소리가 나는 생각의 문체(문학평론가 김윤식)도 여전하다.

 주인공 후는 근친상간의 욕망에 기인한 죄의식을 안고 산다. 사촌누나인 연희를 사랑했던 그는 자신의 욕망이 연희를 범한 뒤 버린 박 중위의 그것과 닮아있음을 깨닫고 견딜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 또 군사정권 독재자의 최측근이었던 한정효를 짓누르는 것은 권력욕이 야기한 시대의 비극에서 비롯한 죄의식이다.

 “죄의식은 인간다움이에요. 죄의식이 없다면 양심이 없는 뻔뻔한 인간이거나 성화(聖化)한 바른 인간이죠. 특히 후는 내면에 민감한 부분이 있는 사람이에요. 자기행동을 그냥 넘기지 못하는 거죠.”

 하지만 시대는 죄의식이 없었다. 권력의 폭력성은 지상에서 가장 먼 천산수도원까지 미친다. 독재자에게 등돌린 한정효를 유폐시키기 위해 군인들은 수도원을 유린한다. 박 중위를 칼로 찌른 뒤 천산수도원에 숨어 있던 후는 강제로 쫓겨난다.

 “수도원에 있는 사람들은 세상을 버렸지만 세상은 그들을 놔주지 않았어요. 세상의 질서가 거기까지 미치는 거죠. 지상은 원치 않는 질서와 우연한 개입에 의해 좌우되는 불완전한 공간이에요.”

 독재자가 부하의 총에 생을 마감하고, 또 다른 장군이 정권을 잡은 뒤 수도원을 없애라고 명령한다. 한정효는 형제들을 지키기 위해 수도원을 떠나 길을 걷는다. 하지만 남은 수도사들은 생매장된다. 우여곡절 끝에 사촌누나 연희를 만난 후는 자기 아버지가 연희를 박 중위에게 사실상 팔아 넘겼다는 사실에 절망하게 된다.

 접점이 없던 후와 한정효의 삶은 길에서 포개지고, 귀향처럼 돌아온 천산수도원에서 하나가 된다. “두 사람의 죄의식은 다른 차원의 것이지만, 서로 돌봐주고 같이 벽서를 만들어요. 후가 수도원에 도착하자 한정효는 안심하고 숨을 거두죠. 아주 먼 자기 자신이라고 느낀 거에요. 수도원을 향해 간 두 사람은 다르면서도 같아요.”

 한정효는 세 평 남짓한 방에 생매장됐던 형제들을 각각의 방에 매장했다. 한정효를 묻은 것은 후였고, 후는 비극적 최후를 맞은 형제를 위해 한정효 대신 화려한 벽서로 방을 장식한다. 후는 스스로 매장하는 길을 택한다. 천산수도원은 카타콤(초기 기독교 공동체 신자들의 지하무덤)이 된 것이다.

 “벽서는 참회의 방식이자 고해성사에요. 죽은 형제들을 신이 지켜 달라는 마음을 담은 것이기도 하고. 후에게는 카타콤은 도시에서의 생활이었어요. 도시를 떠나 수도원을 돌아오는 순례가 후를 구원한 거죠.”

 후와 한정효는 지상에서는 무력했던 ‘말씀의 힘’을 믿었던 사람들이다. 공권력의 잔혹함이 만들어낸 참혹한 비극을 순교로 바꿀 수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일지 모른다. 그래서 책의 마지막 구절은 의미심장하다.

 ‘세상의 권력은 그들의 구별된 공간인 천산을 침범하고 파괴해 카타콤으로 만들었지만 그들을 침범하고 파괴하는 권력이 행사되는 이 세상이야 말로 카타콤에 다름 아님을 그들의 구별된 삶과 특별한 죽음으로 증거했다.’

◆이승우=1959년 전남 장흥 출생. 81년 ‘한국문학’ 등단. 소설집 『일식에 대하여』 『미궁에 대한 추측』 등. 장편 『그곳이 어디든』 『식물들의 사생활』등. 현대문학상(2007)·황순원문학상(2010) 등 수상. 『식물들의 사생활』이 세계 유명작가의 작품을 엄선한 프랑스 갈리마르 출판사 폴리오 시리즈에 포함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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