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 들었다고 다 살인 미수인가 … 기자는 무죄를 택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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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술 취한 옆집 남자가 문을 두드렸다. 무심코 문을 열었더니 섬뜩한 칼날이 먼저 보였다. 여자는 방에 있는 조카들에게 문을 잠그라고 외쳤다. 남자는 방문을 열라면서 칼을 여자의 배쪽으로 들이밀었다. 놀란 여자는 칼날을 손으로 잡고 막았다. 저항에 부닥치자 남자는 칼 손잡이 부분으로 여자의 머리를 20회 내리쳤다. 여자는 화장실로 피해 112에 신고했다. 남자는 도망쳤다.’ 이 사건에서 옆집 남자는 과연 살인 의도를 가지고 있었을까. 지난 7월 23일 서울동부지법에서 진행된 국민참여재판. 실제 배심원과는 별도로 이 재판에 참여한 11명의 ‘그림자 배심원’은 재판 전 과정을 지켜본 뒤 이 사건을 놓고 평의를 했다. 본지 기자도 그림자 배심원으로 참여했다.

 쟁점은 ‘살인의 고의성’ 여부였다. 고의가 인정되면 법정형이 5년 이상인 살인미수, 고의가 인정되지 않으면 3년 이상인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 위반(집단·흉기 등 상해)으로 처벌을 받게 된다. 피고인 윤모(37)씨는 죽이려고 한 게 아니라 옆집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나 조용히 시키려고 위협하다 생긴 일이라고 주장했다.

 그림자 배심원들은 고의가 ‘있다’와 ‘없다’로 팽팽하게 맞섰다. 기자는 확고하게 고의가 있다는 쪽이었다. 요리를 하던 중도 아닌데 술 취한 상태에서 일부러 칼을 들고 찾아간 점, 단순히 위협할 의도였다면 칼을 들어 보이면서 얘기를 하지 배 쪽에 칼을 들이대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점 등에서다. 고의가 없다고 보는 쪽은 덩치 큰 윤씨가 손쉽게 사람을 죽일 수도 있는 상황에서 칼 손잡이로 머리를 내리 치는 데 그친 점, 지속적으로 조용히 하라고 외친 사실 등을 이유로 들었다. 격론이 오간 끝에 한 그림자 배심원이 말했다. “칼을 들고 나가면 다 살인의 고의가 있다는 것이냐. 진짜 죽이려고 했으면 10분 넘게 머물렀는데 칼 손잡이로 머리만 내려치고 나왔겠느냐.”

 이때 머릿속에는 ‘합리적 의심’이 싹트기 시작했다. 충분히 범행이 가능한 조건에서 그는 범행을 저지르지 않았다. ‘도대체 왜?’라는 질문에 대답이 궁했다. 결국 ‘범죄 사실이 합리적 의심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증명되지 않으면 무죄로 추정해야 한다’는 형사재판의 원칙에 따라 살인 미수 혐의에 대해서는 무죄를 선택하게 됐다. 그림자 배심원 평결 결과는 9명이 무죄, 2명이 유죄였다. 실제 배심원들도 살인 고의에 대한 증명이 부족하다는 이유를 들어 만장일치로 무죄 의견을 내고 상해 혐의만 유죄로 인정했다. 재판부도 이를 따랐고 징역 2년6월을 선고했다.

◆그림자 배심원(shadow jury)=국민참여재판에서 정식 배심원과 별도로 구성돼 재판 전 과정을 지켜보고 실제 배심원과 똑같이 평의 및 평결 절차를 거쳐 결론을 도출해 내는 모의 배심원 제도. 평결 내용이 판결에 반영되지는 않는다.

◆탐사팀=최준호·고성표·박민제 기자, 오단비 인턴기자(연세대 국문학과), 김보경 정보검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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