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고정애의 시시각각

대통령에게 정당이란 …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4면

고정애
정치국제부문 차장

“각자 다른 색깔을 취해온 정부가 같은 결론에 도달했다면 그 판단을 받아들이는 게 옳다고 생각한다.”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이 한 말이다. 제주해군기지에 대해 김영삼·김대중·노무현·이명박 정부가 동일한 결정을 한 걸 두고서다. 어디 해군기지 문제만 그렇겠는가.

 이들 네 대통령이 유사한 결론에 이른 문제가 또 있으니 국회 즉 정당 문제다. 아니, 노태우 대통령까지 다섯 대통령이다. 국회를 거수기로 만들곤 했던 제왕적 대통령들인데 무슨 얘기냐 싶을 거다.

 실상은 좀 다르다. 노무현 대통령 시절 청와대 정책실장을 지낸 김병준 국민대 교수가 『99%를 위한 대통령은 없다』에서 소개한 일화다.

 “노 대통령이 급하게 미국을 다녀온 적이 있다. 2박3일 일정이었던 것 같은데 잠을 주로 비행기 안에서 잘 정도로 불편한 방문이었다. 노 대통령은 방문 전 3일간 두문불출하며 관저에서 한 발짝도 안 나오고 면담도 일절 하지 않았다. 비서실장이고 정책실장이고 다 안 만나주니 뭘 하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그저 미국 가는 준비를 하시나 보다 했는데 나중에 보니 짐작이 틀렸다.”

 눈앞에 둔 미국 대통령과의 껄끄러운 회담보다 더 노 대통령의 마음을 빼앗은 건 ‘여의도’ 문제였다. “대통령과 정부가 일을 해야 하는데 여소야대(與小野大) 정국은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하게 하고, 게다가 여당의 일부는 벌써 등을 돌려 꼼짝할 수 없는 상황”(김 교수)을 어찌 타개할지였다. 노 대통령은 야당에도 권력을 나눠주는 대연정에 착안했다. 여야 모두로부터 좋은 소리를 못 듣고 그 자신 역시 나중 ‘죄’라고 했지만 그땐 그리 절박했다.

 소수파인 노무현 대통령이 유난스러웠던 거라고? 그렇지 않다. 노태우 대통령은 약한 여당을 견디다 못해 3당 합당을 했다. 그러곤 “역사적 사명”이라고 했다. DJP공조는 선거연대였지만 동시에 통치를 위한 연합이기도 했다. DJ는 수십 명의 야당 의원을 빼내 여당의 몸집을 불렸고 공동여당인 JP당을 원내교섭단체로 만들어주기 위해 의원 꿔주기도 마다하지 않았다. DJP 공조는 3년8개월간 지속됐다. 그런데도 DJ는 공조 파기 후 “우리에게 소수 정권의 험난한 길이 기다리고 있었다”고 한탄했다.

 이명박 대통령도 다르지 않다. 그는 재임 중 두 차례 총선에서 여당이 과반 의석을 확보하는 ‘호사’를 누렸다. 그의 덕이든 아니든 말이다. 하지만 내용적으론 여소야대였다. 박근혜 후보와의 갈등 때문이다. 2010년 6월 세종시 수정안 표결 때 극명했다. 한나라당(새누리당의 전신) 소속 168명 의원 중 이 대통령과 같은 생각을 한 이는 105명에 그쳤다. 그로부터 두 달 뒤 이 대통령은 박 후보를 마주해야 했다.

 대통령에게 정당, 정말 중요하다. 상상 이상이다. 대통령의 정책과 비전은 예산과 법안으로 실현된다. 그걸 좌지우지하는 게 국회이고 정당이다. 정부와 여당이 먼저 밀고 당기기를 하고 다음엔 여당과 야당이 줄다리기를 한다. 여당이 강하지 않으면, 머릿수라도 충분하지 않으면, 또 대통령과 여당이 원만하지 않으면 일이 안 된다. 노무현 대통령은 “역사는 대통령이 움직이는 게 아니다. 정권은 정당에 있다”고까지 말했다.

 안 원장이 대통령이 된다면 마주할 현실이기도 하다. 그런데도 그와 가깝다는 이들 중 상당수가 “창당도 입당도 하지 말라”(문국현)고 말한다. 무소속 ‘시민’ 후보로 나서란 얘기다. 안 원장 본인도 『안철수의 생각』을 낼 무렵 정당에 대한 혐오감을 드러냈다. 2007년 무소속으로 뛴 이회창 후보란 선례가 있긴 하다.

 그러나 그건 선거만 본 거다. 국정 운영을 하겠다는 사람의 자세는 아니다. 집권하는 건 ‘개인’이 아닌 ‘세력’이다. 3위 주자였던 이회창 후보도 정치하기 위해 결국 창당했다. 하물며 대통령에겐 정당이, 그것도 유력한 정당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도 선거 때엔 홀로 뛰겠다? 이철희 두문정치전략연구소장은 “설사 그렇게 해서 안 원장이 대통령이 된다고 한들 성공할 수 있을까요?” 라고 했다. 그만의 의문은 아닐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