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심원들, 음주 범행 양형에 거의 참작 안 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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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관과 배심원은 양형을 결정할 때 어떤 요소들을 중요하게 반영했을까. 국민참여재판 판결문 분석 결과 피해자와의 관계, 합의 여부, 범행의 계획성 등이 공통적으로 중요하게 고려되는 요소로 나타났다. 하지만 배심원은 법관과 달리 범행 당시 술에 취했다고 형을 깎아주는 주취감경은 양형에 크게 고려하지 않는 것으로 분석됐다.

 본지 탐사팀은 법관과 배심원이 어떤 양형 요소를 중요하게 반영하는지를 밝혀내기 위해 경기대 이수정 교수팀에 의뢰, 법관과 배심원 양형에 대한 회귀분석(回歸分析)을 시도했다. 회귀분석은 결과에 영향을 미치는 다양한 변수 중 상대적으로 영향력이 큰 변수를 찾아내는 통계분석 기법이다.

 분석 결과 전체 사건에서 양형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요소는 피해자와의 관계인 것으로 나타났다. 법관과 배심원 모두 피고인과 피해자가 가까운 사이일수록 더 높은 형을 선택했다. 패륜 등 미풍양속에 어긋나는 범행일수록 사실상 가중처벌했다는 의미다. 법관은 피해자가 배우자인 경우 평균 94.1개월의 형을 선고했으며 부모(86.1개월), 자식(78개월) 순으로 줄었다. 모르는 사이(비면식)였던 경우 46.1개월로 가장 낮았다. 배심원도 법관과 같은 순으로 배우자에서부터 비면식 관계까지 순차적으로 형이 낮아지는 경향을 보였다.

 하지만 법관은 배심원과 달리 범행 당시 술에 취해 심신미약 상태였는지도 양형에 중요하게 고려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대전지법에서 지난해 살인 혐의로 징역 13년을 선고받은 이모(52)씨 사건이 그런 경우다. 이씨는 동거하던 노모씨에게 다른 남자가 생겼다는 얘기를 듣고 만취한 상태에서 노씨를 무자비하게 때려 살해했다. 배심원은 다수의견으로 15년형을 선택했다. 하지만 재판부는 술에 취한 상태에서 우발적으로 범행에 이르게 된 점 등을 배심원보다 더 참작해 13년을 선고했다.

 전문가들은 근래 들어 성범죄에 대해서는 술에 취했다고 형을 감해주지 않게 하는 등 제도가 바뀌고 있지만 다른 범죄에선 여전히 만취 상태에서의 범행을 봐주는 관행이 폭넓게 자리 잡고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이 교수는 “배심원들은 형을 결정할 때 법관과 달리 술에 취했는지를 중요하게 고려치 않는다는 것이 이번 분석을 통해 입증됐다”고 설명했다.

 이밖에 범행의 계획성도 법관과 배심원 모두 양형에 중요하게 고려하는 요소로 분석됐다. 치밀한 계획을 세우고 범죄를 저지른 게 아니라면 형을 더 낮게 줬다는 의미다. 또 범죄를 저질렀어도 피해를 복구하기 위해 노력한 점(처벌 불원)도 주요 양형 요소로 고려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교수는 “법관과 배심원이 내린 양형 자체는 우연히 비슷할 수 있지만 거기에 도달하는 과정에서 고려하는 요소까지 큰 차이가 없다는 것은 배심원의 판단이 배심원 제도 도입 초기에 우려했던 것과는 달리 객관적으로 잘 이뤄지고 있다는 방증”이라고 분석했다.

◆ 탐사팀=최준호·고성표·박민제 기자, 오단비 인턴기자(연세대 국문학과), 김보경 정보검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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