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범죄 ‘국민판결’ 판사보다 엄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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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에 취해 6세 여아를 집 안방까지 뒤쫓아 들어가 성추행한 50대 남성이 있다. 또 말다툼 끝에 우발적으로 아내를 칼로 찔러 살해한 남편이 있다. 판사가 아닌 당신이라면 이들에게 어떤 형을 내릴 것인가.

 올해로 시행 5년째를 맞은 국민참여재판에 참여한 배심원들은 성범죄에 대해 법관보다 평균 8개월 이상 높은 양형을 한 것으로 나타났다. 배심원들은 또 술에 취해 저지른 범죄라고 해도 법관과 달리 형을 깎아주지 않는 것으로 분석됐다. 유·무죄를 판단할 때는 법관보다 더 명확한 증거를 요구하는 경향을 보였다. 본지 탐사팀이 지난 5년간 국민참여재판으로 진행된 사건의 판결문 546건(피고인 569명, 참여 배심원 4282명)에 기재된 배심원의 평결과 양형 의견을 법관의 판결과 비교 분석한 결과다.

 이에 따르면 성범죄에 대한 배심원의 양형(다수 의견 기준)은 평균 68.1개월로 법관(59.9개월)보다 8개월 이상 높았다. 살인, 강도, 폭행·상해 치사 등 다른 강력범죄에서는 법관과 배심원의 평균 양형이 1~2개월 차로 비슷했던 것과는 다른 결과다. 국민이 성범죄는 엄벌해야 한다는 법감정을 지니고 있다는 의미다.

 또 본지가 경기대 이수정(범죄심리학) 교수팀에 의뢰해 법관과 배심원 양형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를 분석(회귀분석)한 결과 배심원은 법관과 달리 술로 인한 범죄라고 해서 감형을 해 주는 주취감경(酒醉減輕)을 주요 양형 요소로 고려하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 교수는 “일반 국민은 성범죄와 주취감경에 대한 법관의 관행적 양형이 지나치게 관대하다고 보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하지만 살인·강도 등 강력범죄 전체적으로는 배심원이 법관보다 양형을 세게 한 경우가 10건 중 1건꼴(10.3%)에 불과해 대체로 양형에 신중한 모습을 보였다. 배심원 양형이 법관보다 더 낮았던 사건은 17.6%, 같았던 사건은 72.1%였다.

 배심원들은 유·무죄를 판단할 땐 법관보다 엄격한 증거를 요구했다. 배심원과 법관이 유·무죄를 다르게 판단한 사건은 총 51건(9.3%). 이 중 ‘배심원 무죄→법관 유죄’ 사건이 47건, 반대는 4건이었다. 불일치 이유로는 유죄의 증명이 부족했다고 본 경우가 47.1%로 가장 많았다. 법관 출신의 이상원 변호사는 “법관들은 많은 범죄자를 재판한 경험에 비춰 주변 정황 등을 폭넓게 인정해 유죄로 판단하는 측면이 있지만 편견이 없는 상태인 배심원은 ‘억울한 피고인을 만들어선 안 된다’는 근본이념에 충실한 평결을 하고 있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 탐사팀=최준호·고성표·박민제 기자, 오단비 인턴기자(연세대 국문학과), 김보경 정보검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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