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분수대

오래된 관습을 벗기는 작업은 서로에게 남는 장사다 며느리나 시집 식구나 우리 모두에게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9면

[일러스트=김회룡 기자]

헤어지기 섭섭하여 망설이는 형님네 부부와 포옹을 했다. 아주버님은 흡사 나무박스를 끌어안은 느낌이다. 탄탄하던 어깨와 듬직한 가슴은 어디 가고. 6개월 전인가. 시아주버님이 장이 안 좋아서 수술하신 후 우리 집 황토별채에서 두 달가량 지내시고는 오늘 가신단다. 시골이 공기도 물도 좋아서인지 오실 때보다 다소 생기가 있어 보여 다행이다. 좋은 의사도 만났고 깨끗하게 치료도 했고 황토 집에서 회복도 하셨으니 곧 완쾌되시리라.

 형님과 나. 그다지 친하지 않은 손위 시누이와 올케 사이였다. ‘황토 집에 오세요. 몸 회복하기 좋대요’ 하며 권한 건 나였지만 막상 오셨을 땐 걱정도 됐다. 시집 식구라면 일부러라도 멀리 떨어져 있으려 한다는데 오시라 해놓고선 옆에서 매일매일 마주쳐도 괜찮을까.

 다행히도 허름한 황토 집이 원룸 형태로 대충 갖춰져 있어서 60m 떨어져 있는 두 집이 뒤죽박죽 섞여 살 필요는 없었다. 각자 하던 대로 따로 밥해 먹고 따로 놀고. 오가며 눈이 마주치면 눈인사나 하고. 불 꺼지면 주무시나, 켜지면 일어나셨나. 필요한 용건은 문자로 해결하고. 서로가 챙겨줄 의무도 대접받을 권리도 없었다.

 일주일 후. 슬슬 궁금해졌다. 문자로 가도 되느냐 묻고는 들락날락하기 시작했다. 환자 병구완하느라 애쓰시는 게 안쓰러워 그 후로는 반찬도 수시로 가져다 드리고 필요한 건 없나 이모저모 살피기도 하고.

 환자가 주무시는 시간에 한 번씩 형님이 우리 집으로 내려와 커피도 마시며 수다도 떨었다. 하루 이틀 쌓이는 수다를 통해 형님이 시누이 아닌 대학 9년 선배 언니가 됐다. 따뜻하고 속도 깊고 푸근하고. 참 괜찮은 여자다. 피상적인 서로에 대한 의무감에서 벗어나니 새로운 관계 형성이 되더라. 이런 느낌은 둘 다 피차 마찬가지. 형님도 형님이 알았던 과거의 내가 아니란다.

 그렇다면, 30년 넘게 때마다 만나고 얘기한 사람은 누구였을까. 그 긴 세월 동안 인간과 인간이 아닌 시누이와 올케가 만났던 게다. 시집이라는 색안경을 쓰고 시집 식구를 바라보면 다 ‘시집스럽게’ 보인다. 같은 말도 고깝게 들리고 단순한 말에도 의미를 찾으려 애를 쓰고.

 엊그제 ‘넝쿨째 굴러온 당신’이란 TV 드라마의 한 장면. 남편(유준상)이 부인보고 자기 여동생에게 존대하라고 하자 부인(김남주)이 ‘당신은 내 동생에게 반말하면서 왜 나만…’ 하던데. 맞다. 왜 부인은 어린 시집 식구들에게 반말하면 안 되고 남편은 어린 친정 식구들에게 반말해도 되나. 오래된 관습이라서? 늘 그래 왔으니까? 이런 겉치레에 불과한 껍데기 좀 벗기자. 사람 냄새 나는 인간적인 관계가 될 게다.

 오래된 관습을 벗기는 작업은 서로에게 남는 장사다. 며느리나 시집 식구나 우리 모두에게.

 이달 말이 추석이다. ‘며느리니까 당연히… 해야’. 이 생각만 거둔다면 이번 추석 하늘은 모두에게 파랗게 보일 것이 분명하다.

글=엄을순 객원칼럼니스트
사진=김회룡 기자

▶ [분수대] 더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