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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 더 미룰 시간이 없다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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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4호 31면

내가 중학생이던 시절 시골 외할아버지 댁에 놀러 가 며칠을 묵을 때였다. 당시 TV에서 이산가족 찾기 운동이 한창이었다. 외할아버지는 며칠 동안 TV 앞을 떠나지 않으셨다. 어느 날 나는 한밤중에 잠에서 깼는데, 외할아버지가 이불을 뒤집어쓴 채 TV를 보고 있는 걸 보게 됐다. 잠결에 ‘이 더운 여름에 왜 이불을 쓰고 계실까’ 하고 의아하게 생각했다. 그런데 얼마 후 외할아버지의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 왔다. 전쟁 때 북한에 두고 온 가족에 대한 사무친 그리움이 외할아버지를 울리고 말았던 것이다. 지금도 한여름이 되면 문득 그때 기억이 떠올라 가슴이 아프다.

삶과 믿음

가끔씩 이산가족들의 사연을 접하게 된다. 그럴 때마다 생각이 든다. 세상의 어떤 드라마가 이보다 더 슬플 수 있을까. 피란을 떠나며 작은집에 맡긴 열 살의 딸이 환갑을 훌쩍 넘은 나이가 됐다. 이젠 늙어버린 어머니 앞에서 “엄마, 왜 이제 오셨어요!” 하며 울부짖는다. 그런 딸에게 어머니는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그 오랜 세월의 피맺힌 한의 절규를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한국전쟁이 끝난 뒤에도 의용군에 끌려간 아들을 생각하며 대구역에서 40여 년을 기다리다 세상을 떠난 늙은 아버지의 마음은 어땠을까. 전쟁터에 간 아들을 기다리며 죽을 때까지 40년 동안 사립문을 열어놓고 잠자리에 들었다는 할머니의 심정을 누가 온전히 알 수 있을까. 세상에 어떤 단어도 이별보다, 그것도 기약 없는 이별보다 더 아픈 단어는 없을 것이다.
우리나라 사람들 중 분단과 전쟁의 상처를 안고 있지 않은 가족은 거의 없을 것이다. 우리의 할아버지·할머니·부모들은 배고픔과 헐벗음, 인간의 기본적인 삶조차 결핍된 시대를 다 헤치며 살아오신 분들이다. 상상도 못할 죽음과 고통, 공포의 늪을 온몸으로 헤쳐온 우리 어른들의 고통은 어떤 말이나 글로도 다 표현할 수 없다. 역사가 남긴 이 고통과 한의 흔적은 우리의 피와 살 속에도 어떤 형태로든 녹아 흘러가고 있을 것이다.

얼마 전 독립운동을 했다는 한 어르신의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나라가 없는 비통한 현실에 대해 생각하다 보면 일본에 대한 미움도 미움이지만, 선조들에 대해서도 미움이 많이 생긴다. ‘왜 잘못도 없는 후세가 이런 고통을 당하게 하나’ 하는 생각에 울분이 끓는다”며 눈물을 흘리는 그분 말씀에 나도 공감이 갔다. 우리 시대의 고통스러운 역사를 다음 세대에 물려줘서는 안 된다. 남북으로 갈라진 이산가족들도 이제는 나이가 들어 세상을 떠난 이들이 많다고 한다. 우리는 남북이 갈려 서로 증오하고 미워하는 비참한 역사의 악순환을 끊어야 하는 사명감을 가져야 한다.

이 땅에 사는 한 그 누구도 남북문제에 자유로울 수 없다. 또한 어떠한 경우에도 남북문제는 폭력이 아닌 신뢰를 바탕으로 대화를 통해 해결해야 한다. 물론 민족화해 문제는 남북한 정부뿐 아니라 종교단체와 민간단체 등 모든 국민이 함께 지혜를 모아 풀어 나가야 한다. 남북한이 대화를 시도해 이 땅이 분열과 불화의 깊은 상처를 딛고 사랑과 일치, 화해의 땅으로 새롭게 태어나기 위해 무엇이든 시작해야 한다. 이제 우리에겐 더 미룰 시간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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