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중앙시평

진실의 한마디가 전 세계보다 무겁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5면

이우근
법무법인 충정 대표

“러시아 민중은 반세기 동안 거칠고 형편없는 음식을 먹어온 탓에 생물학적으로 퇴화되고 있다. 이런 현상은 정치적 선동, 사상적 세뇌, 종교와 문화에 대한 억압으로 인해 더욱 심해졌다. 자유를 찾는 유일한 방법은 술에 취하는 것뿐이다.” 이달 3일로 4주기(週忌)를 맞은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이 『치명적 위험』에 쓴 말이다.

 소련은 전 국토가 그대로 거대한 감옥이자 강제수용소였다. 스탈린을 비판한 편지 한 통 때문에 반역자로 몰려 사형선고를 받은 솔제니친은 그 자신의 말처럼 ‘모든 것을 빼앗겨 자유로워진’ 이단아였다. 철의 장막 속에 핀 한 떨기 양심의 불꽃은 외로운 진실의 빛을 밝히며 이념의 광풍 앞에 홀로 맞섰다. 역사는 그를 ‘러시아의 양심’으로 기억한다.

 10여 년에 걸친 강제수용소에서의 혹독한 체험은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 『암병동』 『수용소군도』 등 걸출한 작품들의 바탕이 되었는데, 삶의 근원을 파고드는 도덕적 성찰로 현대 러시아문학의 품위를 드높인 솔제니친의 소설들은 뛰어난 비극적 문학인 동시에 생생한 체험의 역사적 기록이기도 하다.

 소련에서 강제 추방된 솔제니친은 하버드대의 졸업식 연사로 초청됐을 때 ‘자유주의의 부패, 개인주의의 타락’을 준열하게 꾸짖어 서구의 지성들을 부끄럽게 만들었다. 소련 붕괴 후 20년 만에 귀국한 그는 경제적 풍요를 갈구하는 러시아인들의 물신주의 풍조를 경계하면서 인간성의 존엄과 가치를 역설했다. 이념과 체제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비인간적 야만성에 대한 그의 저항정신에는 아무 변화가 없었다. 솔제니친이 갈망한 것은 배부르고 무절제한 자유사회가 아니라 정의와 평화가 공존하는 박애의 공동체였다.

 소련만의 아픈 역사가 아니다. 2400만 인민이 3대에 걸쳐 위대한 수령을 결사옹위하는 21세기의 이방지대, 수백여 곳의 정치범수용소·교화소·강제노동수용소 등지에 수십만 명이 갇혀 있는 현실의 디스토피아(dystopia), ‘최고 존엄’만 있을 뿐 ‘인간의 존엄’은 찾을 길 없는 우상의 제국…, 지금 북한 주민들이 겪는 생물학적 퇴화현상은 러시아에 비할 바가 아니다. 얼마 전 북한군은 현역 복무 남성의 신장 기준을 남한의 초등학교 4학년생 평균 키에 가까운 1m42㎝로 낮췄다고 한다. 이것이 광복 67년을 맞는 남과 북의 현실이다.

 소련에는 거친 음식이나마 먹을거리가 있었지만, 북녘 땅에서는 그것조차 구하기 어렵다. 러시아인들은 술에 취해 자유를 얻으려 했지만, 북한 주민들은 마약에 취해 현실을 잊으려 한다. 어린 꽃제비들은 쓰레기통을 뒤지며 시장바닥을 헤맨다. 분배의 투명성만 보장된다면 인도적 식량지원은 불가피해 보인다. 민주화보다 산업화가 우선이라고 외치던 경제성장론자들이 북한 주민의 인권을 걱정하면서 생존권을 외면하는 태도는 위선적이다.

 반면에 빵보다 인권이 먼저라고 울부짖던 민주투사들이 북녘의 처절한 인권상황에는 눈을 감은 채 무조건의 식량지원만을 요구하는 것은 기만적(欺瞞的)이다. 그들이 아는 북한 동포의 인권이란 그저 ‘먹을 권리’뿐이다. 자유도 인간의 존엄도 없이…. 이토록 참담한 인격모독이 또 있을까.

 자유와 인권을 짓밟는 이념적 도그마에는 어김없이 비참한 종말이 기다리고 있다. 북한 유일체제의 열렬한 지지자였던 루마니아의 독재자 차우셰스쿠도 아랍민족주의의 우상 카다피도 모두 끔찍한 최후를 맞았다. 카다피가 시민군의 총에 사살되자 북한은 중동에 체류하는 주재원들의 귀국을 막았다. 재스민혁명의 열기가 북한에 전파되는 것을 차단하려는 의도이겠지만, 인민의 눈과 귀를 막는 인민민주주의는 어불성설이다. 민족·주체·통일의 슬로건으로 그 허구를 덮지 못한다.

 “진실의 한마디가 전 세계보다 무겁다(outweigh)!” 솔제니친이 노벨문학상 수상소감에서 밝힌 말이다. 북한 민주화를 위해 투쟁해온 김영환씨가 중국 공안에 체포돼 온갖 고문을 당했다는 소식을 접하면서 문득 솔제니친의 깊은 울림이 떠오른 이유가 무엇일까. ‘강철서신’의 주사파로서도 치열했지만, 북한의 ‘처단 대상’으로 지목될 만큼 반(反)주사파로서 더욱 치열한 그의 외침이야말로 이 시대에 절박한 진실의 목소리이기 때문이 아닐까. 정치권의 영입 제의에 눈길 한 번 주지 않은 그의 순수한 외침이.

 통영의 딸들, 강제 북송된 탈북 동포들이 북녘 하늘 밑 어딘가에서 힘겨운 숨을 몰아 쉬는 오늘, 우리는 솔제니친이 남긴 영혼의 목소리를 그의 육신과 함께 지하에 묻어두지 못한다. 이념의 동토(凍土)를 녹인 자유와 평화의 절규, 전 세계보다 무거운 진실의 한마디를.

이우근 법무법인 충정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