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바마 ‘담대한 희망’ 4년 뒤 백악관 입성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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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1988년 민주당 대통령 후보를 뽑는 전당대회에서 마이클 듀커키스 후보에게 패한 흑인 인권운동가 제시 잭슨이 단상에 올랐다. “듀커키스의 선조는 이민선을 타고 왔지만 제 선조는 노예선을 타고 왔습니다. 선조들이 무엇을 타고 왔든 우리는 지금 한 배를 타고 있습니다.” 듀커키스를 지지하는 잭슨 목사의 연설에 청중은 우레 같은 박수를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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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4년 또 한 명의 흑인이 민주당 전당대회장에 섰다. 일리노이에서 온 상원의원 버락 오바마였다. 명사도 아니었고, 후보도 아니었다. 하지만 ‘담대한 희망’이라는 제목의 17분 연설은 모든 미국민을 감동시켰다. “진보만의 미국은 없습니다. 보수만의 미국도 없습니다. 미‘합’중국만이 있을 뿐입니다.” 뉴욕타임스는 “오바마가 참석자들을 ‘녹아웃’시켰다”고 보도했다. 연설 한 번으로 민주당의 희망이 된 그는 4년 뒤 대통령이 됐다.

 미국 정치의 절반은 ‘말(言)’이다. 팽팽한 구도에서 말 한마디가 승부를 결정짓는다. 특히 대선후보를 선출하는 전당대회는 그런 말의 경연장이다.

 오바마가 존 F 케네디, 빌 클린턴 등 민주당의 명연설 계보를 잇는다면 공화당에는 에이브러햄 링컨, 로널드 레이건이 있다. 에너지 위기가 한창이던 1980년 공화당 전당대회 후보 수락 연설에서 레이건은 “미국은 아직 아침”이라고 큰소리쳤다. 그해 미 유권자들은 에너지를 아끼기 위해 스웨터를 입고 다니던 지미 카터 대통령을 외면하고 레이건을 선택했다.

 2008년 미니애폴리스에서 열린 공화당 전당대회의 스타는 부통령 후보인 세라 페일린이었다. 페일린은 “나는 평범한 하키맘(하키를 배우는 자녀를 차로 데려다 주는 엄마)”이라고 해 보통사람들의 가슴을 뒤흔들었다. 그녀가 부통령 후보로 지명된 지 24시간 만에 공화당엔 700만 달러의 후원금이 밀려들었다. NBC는 “보수주의자들이 그들의 ‘오바마’를 찾아냈다”고 보도했다.

 정치인의 말은 또한 독(毒)이 되기도 한다. 페일린이 그랬다. “미국은 동맹인 북한 편에 서야 한다”는 실언이 그녀의 거품을 걷는 신호탄이 됐다. 1976년 제럴드 포드는 지미 카터와의 TV토론에서 “동구는 소련의 지배를 받지 않는다”고 말해 ‘외교의 문외한’이란 비판을 자초했으며, 끝내 대선에서 패배했다.

 조지 H W 부시는 1988년 공화당 대통령 후보 수락 연설 때 왼손 집게손가락을 입술에 대고 이렇게 말했다. “의회가 세금 인상을 강요하더라도 나는 ‘아니오’라고 말할 것입니다.” 이 한마디가 유권자들에게 약발이 먹혀 그는 대통령에 당선됐다. 하지만 눈덩이 재정적자로 1991년 소득세율을 대폭 인상할 수밖에 없었으며 이듬해 선거에서 패배하고 말았다. 그때 민주당의 빌 클린턴이 써먹은 말이 유명한 “문제는 경제야, 바보야”다.

 미국의 전당대회는 대선이 있는 해에 4년 주기로 열린다. 올해 열리는 전당대회에서는 특히 데뷔전을 치르는 공화당 후보 밋 롬니의 후보 수락 연설에 관심이 쏠려 있다. 1월 아이오와 주에서 열린 공화당 후보경선 토론회 당시 롬니는 “오바마의 건강보험 의무 가입을 지지했다”는 릭 페리 텍사스 주지사의 지적을 반박하며 “1만 달러 내기를 하자”고 해 오래도록 구설에 올랐다. 오바마 진영에선 “아이오와 주민 평균 연소득의 5분의1을 장난처럼 내기에 걸자는 롬니는 서민의 사정을 모르는 부자 후보”라고 공격했다.

 오바마와 롬니는 1주일의 간격을 두고 열리는 전당대회 후보 수락 연설을 신호탄으로 TV토론 등에서 맞붙게 된다.

 대선의 해인 2012년 미국은 정치인의 말이 주는 감동에 목말라 있다. 벌써 공화당 전당대회가 열리는 탬파에는 외지인 5만여 명이 몰리고 있다고 미 언론들은 전하고 있다.

미국의 방송들은 프라임타임에 생중계를 하겠다고 예고하고 있다. 2000년 대선에 출마해 조지 W 부시에게 석패한 앨 고어 전 부통령은 케이블 TV가 전당대회 장면을 중계할 때 앵커로 나설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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